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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28.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7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7 후회와 회한

 


후회와 회한. 살면서 마주치는 힘겨움 중 하나다. 어떤 선택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일 수도 있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일 수도 있다.  또는 우연히 내린 결정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 찾아오는 무력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 벌어질 일을 미리 알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내가 어제 4-5킬로를 더 걸어서 Hospital de Orgios까지 왔다면 좀 더 좋은 숙소에, 좀 더 나은 저녁식사를 했었을 것이다. 마을 규모도 훨씬 크고 둘러볼 만한 곳도 많다. 어제 조금 더 걸어서 이곳에서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오늘 Hospital de Orgios에 남아서 하루를 쉴 수는 없다. 겨우 한시간을 걸었을 뿐이다. 어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니다.  몸이 피곤했고 무리해서 걷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지나온 시간을 되새길수록 후회는 깊어진다. 그 후회가 내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가 아니라면 되돌아 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커피와 토스트를 간단히 먹고 이 마을을 떠난다. 


Hospital de Orgio를 뒤로하고 걷는다. 또 걷는다. 9월이다. 뜨거워서 미칠 것 같았던 스페인의 여름이 끝났다. 가방 깊숙히 넣어두었던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두른다. 한두시간 걸으면 여전히 땀이 베어나오지만, 일교차가 제법 커서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운이 몸을 덮친다. 매일 저녁이 되면 발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지만,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등산화를 챙겨 신고 씩씩하게 걷는다. 등산화는 요술장화처럼 아픈 내 발을, 아픈 내 두 다리를 이끈다. 


오늘따라 순례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여름방학 동안 순례자 길을 걷던 학생들은 대부분 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종일 오후의 씨에스타처럼 길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텅빈 마을들 뿐이다. 텅빈 길. 내 발소리가 전부인 길. 엊그제 산 해바라기씨 한주먹을 가방에서 꺼낸다. 입 속에 넣고 우물우물 껍질을 벗겨내 알맹이를 씹어먹는 소리로 텅빈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 

해바라기씨를 씹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큰 도시가 보인다. Astorga다. 큰 순례자 숙소가 있는 도시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예정이다. 그림자에 비친 내 등이 가방 무게 때문인지 점점 굽어진다. 조금씩 버리고 비워낸다고 해도 이 가방 무게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끝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무게. 혼자 이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오늘은 왠지 더 지친다.  순간 옆 차도 뒷편에서 차 경적 소리가 여러번 울린다. 어깨가 축 늘어져 걷고 있는, 이국에서 온 순례자를 응원해 주는 소리다. 뒤돌아보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커플이 보인다. 나도 손을 흔들어 화답한다. 조금 힘이 난다. 낯선 이들의 응원이 이렇게 힘이 될 줄이야. 경적을 몇번 누르고 손을 흔든게 다인데. 타지에서는 감동의 촉수가 예민해진다. 작은 일에 더 크게 감동하곤 한다. 제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달팽이 몸처럼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리긴 하겠지만. 


오늘 걷던 길 중간에 야생 산딸기가 잔뜩 열려 있고 할머니 한 분이 열심히 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짙은 보라빛으로 실하게 영근 산딸기다. 두세개를 따서 입에 넣으니 정말 달다. 재미삼아 조금씩 따서 물병에 담았더니 제법 많다. 자연속에서 무언가를 체취해서 먹어본 기억이 없다. 길가에 야생으로 난 산딸기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다. 자연과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스토가에는 큰 공립 순례자 숙소가 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숙소를 찾아 들어선다. 오래된 건물을 깨끗하게 관리해서 숙소로 만든 곳이다. 인상좋은 할아버지가 접수를 받고 있다. 접수를 마치고 배정된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니 이미 몇몇 순례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짐을 풀어놓거나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고 있다. 내게 배정된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우선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살핀다. 빈대를 내 눈으로 목격한 이후로는, 빈대를 피하기 위한 방법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우선 침대 매트리스 아래나, 나무틀을 잘 살펴봐야 한다. 밤에 활동하는 빈대지만, 낮에는 그런 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눈이 띌까하는 마음으로 매트리스를 들었는데…세상에. 정말 빈대 한마리가 매트리스에 떡하니 붙어 있는게 아닌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 빈대가 맞나.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빈대다. 빈대를 본 이상 이 숙소에서 잠을 잘 수는 없다. 급하게 가방을 들쳐메고 접수대로 가서,


‘죄송한데 마음이 바뀌어서요. 좀 더 걸어가려구요. 환불해 주실 수 있나요?’

‘숙소가 맘에 안드나요?’

‘아니요…그런건 아니고…’

‘그러면 다른 방을 보여줄께요. 사람수가 좀 더 적은 방도 있거든요.’

‘아니요…그런게 아니고…좀 더 걸어가서 다음 마을에서 묵을까 하구요.’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인데 그냥 오늘 여기서 하루 묵는게 어때요? 다른 방 보여줄께요.’


인상 좋은 할아버지는 내 손을 이끌고 기어코 다른 방을 보여주신다. 방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하지만 끝내 나는 빈대 때문이라는 말을 못하고 숙소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나와서 생각하니, 그냥 빈대가 있다는 말을 할걸, 괜히 미안해 할까 싶어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서라도 그 말을 해주는 편이 나았을텐데. 나도 그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충 둘러대고 만 것이다. 숙소를 빠져와서 걸어가려는데, 앞서 걷는 순례자의 다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그 옆 순례자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다리는 온통 붉은 발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물집들과 함께.


‘어제 여기서 잤는데 이렇게 되었어.’

‘너무 심한데…도대체 모한테 물린거야?’

‘빈대래. 안그래도 지금 병원 다녀오는 길이야. 걷기가 힘들어 오늘은 하루 쉬었지.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았어.’ 


내가 오늘 이 숙소에서 잠을 잤다면 그녀의 다리가 곧 내 다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깔끔하게 운영해도 빈대를 박멸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스페인 국가 차원에서도 일이년 전 대대적인 박멸 작업을 했음에도 빈대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더 걷자니 다음 마을까지는 두세시간은 더 가야하고, 또 훨씬 작은 마을이라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숙소에 자리가 있을지도 확실치 않으니, 오늘은 그냥 이 곳에서 다른 숙소를 찾아보는게 낫겠다. 관광안내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친절한 여직원은 서너개의 사설 알베르게와 열개 정도의 호텔을 지도에 표시해준다. 사설 알베르게 한두군데를 찾아가 보았으나, 시설은 깔끔해 보였지만 이미 많은 순레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왠지 빈대가 여기저기 옮겨다니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 그래서 그냥 중급 호텔을 골라 묵기로 했다. 지친 몸으로 마지막 찾아간 호텔은 비지니스 호텔처럼 깔끔했다. 침대의 매트리스도 들쳐보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살펴봐도 빈대의 흔적은 없다. 그리고 입구에 붙어있는 Trip Advisor의 높은 레이팅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숙소를 구하는데 두시간이나 걸렸다.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매일 숙소를 이렇게 골라야하나…남은 순례자길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몰랐으면 그냥 아무데서나 쉽게 잠이 들었을텐데, 내 눈으로 확인한 빈대들. 물린 사람들의 몸. 도저히 모른척 넘어갈 수가 없다. 작은 빈대 한마리에 이렇게 마음이 쓰이다니. 몸과 마음이 지친 탓에 오래된 역사와 화려한 건축물을 자랑하는 이 도시를 둘러보고자 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저녁은 빵과 과일로 대충 떼우고 잠이나 푹 자야겠다.


Distance: San martin de camino – Astorga (23km) 
Time for walking: 8:00 am – 5:00 pm 
Stay:호텔 
A thing to throw away: 눈썹 정리칼 (걷는 중에 눈썹 정리 한적이 없다. 진작 버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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