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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l 0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34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34 사모스의 신부님


 

Tricastela에서 Saria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좀 더 길지만 사모스(Samos)를 거쳐가는 길과 거치지 않고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 사모스는 아름다운 성당과 수도원이 위치한 마을로 유명하다. 순례자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마을에는 크고 작은 성당이 있다. 작지만 기품이 있는 곳도 있고, 규모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지는 성당도 있다. 허름하지만 감동이 밀려왔던 성당도 있고 화려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던 성당도 있다. 종교적인 깊이를 다 헤아리지는 못하더라도 순례자길 위에서 만나는 성당들은 또다른 경험이다.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좀 더 많은 걸 볼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사모스를 거쳐 가지 않는다고 했다. 꽤 돌아 가야하고, 가는 길도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고 피해야할 길은 아니다. 갈림길에서 나는 사모스로 향한다.

다들 빠른 길을 선택해서인지 순례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깊은 숲길이다. 무서운 느낌이 들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꽤 오래 걷고 나니, 곧 사모스라는 표지판을 만난다. 잠시 후 저 멀리 숲으로 둘러싸인 그림같은 성당과 수도원이 눈에 들어온다. 힘들어도 이 길로 오길 참 잘했다. 

고요한 마을이다. 수도하기 좋은 마을 같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차분하다. 느린 것과는 다른 평온함. 세차를 하고 있는 할아버지도 온화한 표정을 지녔다. 가게에서 마주친 아주머니 얼굴에도 걱정근심없는 맑은 표정이 깃들어 있다. 

성당 입구로 들어서니 근처 학교에서 견학을 왔는지 어린 학생들이 돌계단에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다. 성당과 수도원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겠지. 저 멀리 신부님 한 분이 보인다. 무언가 손으로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보여주신다. 작은 면도칼로 손수 깎아 만든 나무 지팡이. 화려한 문양까지 촘촘히 새긴 멋진 지팡이다. 솜씨가 뛰어나다. 성당 안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1시부터 4시까지는 시에스타라 들어갈 수가 없다. 1시가 이제 막 지났다. 아쉽게도 내부는 둘러볼 수 없다. 신부님은 성당 문을 열어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는 곳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하신다. 내부는 보여줄 수 없지만 순레자 확인 도장을 찍어주겠다며…말은 통하지 않지만 대충 눈치로 알아듣는다. 


평생 이곳에서 수도하며 살아왔을 신부님. 순수한 소년같은 표정으로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그분이 만든 지팡이들이 담겨진 바구니를 한참 바라본다. 팔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저 시간이 날때마다 하나하나 다듬어 나가는 그의 지팡이. 팔지도 않을 지팡이를 왜 저렇게 정성껏 만들어 꽂아 놓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질문은 내가 이 길을 왜 걷느냐는 질문과 같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명확한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란 과연 얼마나 될까.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사유하고 또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만 그 어디에도 명쾌한 대답은 없다. 그가 지팡이를 만드는 일이나, 내가 이 길을 걷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작은 가게 안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기념품과 성당과 수도원 엽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천천히 구경하고 신부님이 찍어주는 순례자 도장을 받아 나온다. 그리고 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샌드위치와 맥주 한잔으로 점심을 먹는다. 


사리아 (Sarria)까지는 10여킬로 더 걸어가야 한다. 서너시간쯤 걸릴 것이다. 하지만 킬로수가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고 마을이 큰 경우에는 숙소를 찾는 것까지 생각하면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사리아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로 순례자들이 많이 몰리는 도시다. 여러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어서 순례길을 준비하고 시작하기에도 좋은 지점이고, 이곳부터 산티아고까지만 걸어도 순례자 증서를 받을 수 있어서 사리아부터는 순례자들이 급증한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소매치기들도 많다고 하니 이곳부터 산티아고까지는 소지품에 좀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고딕 스타일의 알세바도르 성당과 중세시대의 요새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 문화와 예술, 갈라시아 지방 고유의 음식까지 맛볼 수 있는 도시인 사리아를 향해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걸어보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다. 이미 다섯 시가 넘어가고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 사모스를 거쳐 오지 않았으면 이미 도착해서 숙소를 구하고 짐을 풀고 마을 구경을 하고 있을 텐데, 아직 마을 입구도 보이지 않는다. 발도 아파오고 목도 마르고. 매일매일 걷는 길이 왜 이리도 힘이 드는지. 

속으로 투덜대며 두어시간을 더 걷고 나니 저 멀리 큰 도시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입구로 막 들어서려는데, 젊은 남성이 다가와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제가 3개월 전에 부인과 함께 문을 연 순례자 숙소에요. 혹시 사리아에 묵고 가실 거면 여기 지도가 있으니 찾아오세요. 시설도 좋고 깔끔하고 개인 방도 있으니 와서 보시고 결정하세요.’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숙소를 열심히 설명한다. 지칠대로 지친 몸이기도 하고 꽤 큰 도시에 숙소가 한두개가 아닐테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도상에 표시된 그 숙소는 여기서도 한참을 더 걸어가야하는, 마을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튼 종이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걷는다. 


여기저기 순례자 숙소 사인들이 붙어 있다. 두어군데 들어가 보니 자리가 다 찼거나 시설에 비해 너무 비싸다. 순례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조용히 지지하는 마을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점점 상업화되어 순례자의 주머니를 상대로 노골적으로 장사를 하려는 현지인들도 많다. 스페인의 경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역사가 베어있는 순례의 의미를 퇴색시켜가면서까지 돈벌이에 열중하는 모습은 적잖히 안타깝다.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깔끔하고 혼자 잘 수 있는 방을 적당한 가격에 찾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아까 받은 쪽지를 펼쳐 약도를 보고 찾아간다. 그가 설명한 게 모두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일 듯하다.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위치도 가장 끝지점이라 거기까지 알아서 찾아올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북적이지 않은 조용한 숙소라면 여럿이 자는 방이라도 괜찮겠다. 깔끔하기만 하다면. 빈대만 없다면.


7시가 다 되어간다. 해는 저물어가고 날도 흐리다. 비가 곧 내릴 것 같다. 저 멀리 광고 쪽지에서 본 숙소가 보인다. 

붉은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제법 큰 건물이다. 벨을 누르니 이층 창문이 열리고 젊은 여성이 잠시 기다리라며 아래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어준다. 문을 연지 얼마 안되어 페인트 냄새가 남아 있다. 두개 있던 개인방은 좀 전에 다 나갔단다. 할 수 없이 여럿이 자는 방을 둘러보는데, 아직 아무도 없으니 나 혼자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새 침대 시트와 배갯잎도 마련되어 있고 침대도 새것이라 깔끔하다. 길에서 만난 그녀의 남편 덕분에 오늘은 편안히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겠다.


큼직하고 깔끔한 욕실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자 좀 살 것 같다. 짓눌리던 어깨의 고통도 서서히 사그라든다. 더 늦게 전에 서둘러 나가 저녁도 먹고 장도 봐야한다.  어둑어둑한 하늘에 비가 후둑후둑 떨어진다. 숙소 근처 가장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뛰어간다.


Distance: Triacastella – Saria (via Samos 27km) 
Time for walking:  10:00 am – 7: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수건 (스포츠 타월 두 개 중 하나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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