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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an 01. 2023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36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36  괜찮아, 다 괜찮아



어제 심하게 걸은 탓에 발목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엄지 발가락 옆에 솟아난 군살이 걸을 때마다 베겨서 아프다. 그렇다고 하루를 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진통제와 근육 소염제를 먹고 걷기 시작한다. 오늘은 Palas de Rey라는 마을까지 26-7킬로를 걸어야 한다. 이 상태로 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제 그제와 달리 날이 화창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 흐른다.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고 걷느라 돌부리에 발이 채인다. 어제 그렇게 붐비던 길이 오늘은 한적하다. 하루만 걷고 돌아간 사람들이 많은건지, 아니면 다들 새벽같이 출발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어제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건지. 


잠시 후 하얀 구름마저 거치고 파란 하늘만이 투명하게 머리 위에 펼쳐진다. 수없이 많은 순례자들이 걸었을 이 길. 그 중 누군가가 써놓은 자동차 표지판 위의 작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When I walk by myself

I am never alone

I miss you and I love you

I walk for you


스스로에게, 또는 길에서 만나는 다른 순례자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왜 걷느냐’이다. 내가 이 길을 걷는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게 한 질문이기도 하다. 


‘스페인에 왜 가니?’

‘걸으러.’

‘걸으러 왜 거기까지 가? 둘레길도 있고 올레길도 있고 국토대장정도 있는데.’

‘다른 곳을 걷고 싶어.’

‘한국에도 너가 안 가본 곳 천지일텐데 왜 그 먼 곳까지 가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곳을 걷고 싶어.’

‘외국에서 십년을 넘게 살고서 또 낯선 곳이라니…’


대부분의 대화는 저랬다.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 현실부적응자쯤으로 생각되기에 큰 부족함은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누구보다 현실적응자였다. 어떤 낯선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빨리 적응했고, 어느 나라에 가서 혼자 살아도 큰 무리없이 잘 살아왔다. 잘 산다는 것, 내가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자리에서 인정받고, 부족함 없는 생활을 영위해가는 것. 그 기준에서라면 완벽한 현실적응자로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많은 것으로부터 물러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생각보다 내가 맡은 일이 먼저였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먼저였다. 모두 내가 선택해서 나아간 길인데도,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치열하게 사는 것이 힘들어져 편안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열정이 사그라들어 목표가 희미해진 것도 아니었다. 생각이 아닌 내 몸이, 머리가 아닌 내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지쳐가고 있었다. 지친 몸과 가슴을 먼저 달래주고 싶었다. 녹슬어 삐걱거리던 몸, 관심을 두지 않아 누렇게 떠가는 내 몸을 뜨거운 태양아래 맘껏 움직여 몸 구석구석 건강한 피가 스며들도록. 그리고 슬픔과 힘겨움이 아닌, 푸르른 자연의 기운이 가슴에 스며들도록.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몸과 가슴의 닫힌 문을 조금은 열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오래 걷기를 바랬던 이유다. 


지난 한달여의 시간동안 내 몸과 가슴이 내 의도와 노력에 얼마나 반응했는지는 모르겠다. 몸이 아프고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몸은 생각치도 못한 힘을 발휘해 나를 놀라게 했다. 생각과 몸의 분리. 영혼과 마음의 분리. 가슴과 머리의 분리. 나라는 인간에게 모두 귀속된다고 여겼던 것들이 조금씩 분리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또 화해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난 멀거니 그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괜찮아…다 괜찮아…’

혼자 걸어도 혼자 걷는 길이 아닌 순례자길. 함께 걷든, 누군가가 있든, 가슴 속에 누군가가 있든, 내 삶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함께 한다고 믿든…이 길은 그렇게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하는 길이다. 혼자라는 외로움보다 함께라는 것을 더 크게 깨닫게 해주는 길이다. 그래서 혼자 걸어도, 또는 누군가와 함께 걸어도 좋은 길이다. 


왜 걸었냐고 누군가가 다시 묻는다면, 내 대답은 여전히 그냥 걷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란 걸 막연히 알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Distance: Portmarin – Palas de rey (27km) 
Time for walking:  9:00 a.m. – 7:00 p.m. (10시간)
Stay: 호텔
A thing to throw away: 비상약 (지사제, 소화제, 감기약, 두통약 등등. 한번도 먹은 적 없고 며칠 남지 않은 일정에 필요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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