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텍스트, 너는 깨진 거울과도 같아서 조각조각 삶을 담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삶보다 더 재미있지. 깨진 거울이 온전한 거울보다 더 흥미로운 것처럼. 그런데 재미를 누릴 에너지는 정작 삶에서 나온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불이 꺼지면 거울마저 깜깜해지는 법이다.
뭐라도 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지금 네 앞의 내가 산 증인이다. 나는 지금 정말, 정말 힘내고 있으니까. 수 년 전의 나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소심함이다. 과거 재기발랄한 무지는 글쓰기의 압박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지만, 뜬구름같이 들뜬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나는 서서히 내려앉았다. 위에서 마냥 굽어보기만 했던 네 차갑고 날카로운 표면 위로. 그때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간 퍼즐로만 여겼던 너의 깨진 단면이 피부를 파고들고 있음을 말이다.
내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너 역시 감당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 누군가의 텍스트는 곧 나의 텍스트이다. 내가 나를 먼저 들여다볼 수 없으면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등단의 목전에서 주저앉은 후 나는 두려웠다. 내 언어와 내 사고의 정점이 고작 그것이었으면 어떡하지. 내가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더는 명징한 너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출근길 지하철을 오가는 낯선 타자 중 하나가 된다면. 그게 타자인지도 모르는 안온하고도 죽은 눈의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면.
그럼에도 나는 수 년을 돌아 이것이 내 본업임을 인정한다. 이것은 어쩌면 고집스러운 하나의 선언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 달간 나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너를 겪었다. 대학원 졸업을 목전에 두고, 내게 가장 버거운 주제를 고집스레 껴안고, 나는 어떻게든 너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자격을 증명하려고 몸부림쳤다. 변화가 넘쳐흐르는 많은 소재들이 내 일신에 깃들었다. 그래도 부도체마냥 나는 어떻게든 그것들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네가 나에게 흐르는 유일한 것이어야 했으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시기였다. 그땐 그랬지. 그러면 지금은?
다 지난 지금은 적당히 괜찮아. 돌연하게 괴물화된 너를 겪은 몇 달은 내게 당혹스러운 만큼 나름 의미가 있었다.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처럼, 지난 몇 달은 내게 끊임없이 불을 껐다 켰다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스위치를 끈 채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거울 앞에서 나를 다시 본다. 그리고 내가 보는 너를 본다. 나는 너를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해. 지난 몇 달을 거쳐 너와 화해를 도모해 왔다고.
이제 나는 새로운 너를 만나고 싶어.
이 다음에 만날 너는 수 년 전의 너와 비슷하고도 다르리라는 기대에 가까운 예감이 든다.
이 예감은 인위적인 다짐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짐할 수 있는 행동 양식 자체가 하나의 징후이기도 하다.
내 사유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그게 어딜까? 확실한 것은,
너는 가슴 뻐근하게 재미있고 나는 그런 너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이기도 웹툰이기도 시이기도 게임이기도 한 너를.
흑암 속 찰나라도 달빛이 내려앉은 이상 너는 반드시 무언가를 비추며 반짝거리게 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 모든 너와 나는, 우린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거야.
또 보자, 텍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