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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념나무 Mar 27. 2020

스타트업 히치하이커 #3 꿔다 놓은 보릿자루

월급 좀도둑이 되어보았다.

할 일은 분명 있었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 이야기]

"오늘은 일단 영업 제안서랑 적당히 공유되어 있는 폴더들 열어서 보세요."

그러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린 C.


이런 C...


1.

[2018년 1월 2일]

[입사일로부터 일주일 경과]


일주일 동안 기다려본 바로, 나를 위한 신규입사자 교육은 커녕 나에게 관심을 주는 사수조차 없었다.

즉 현실에서는 게임처럼 튜토리얼 가이드도, 나를 위한 상냥한 초보자 NPC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엔 HR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10명 좀 넘는 회사에서 그걸 바라는 게 이상하지만, 난 그만큼 철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에 늘어놓은 나의 열정, 주도성, 능동성, 성실성 같은 말 같지도 않은 강점을 증명(수습) 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내가 일구어낸 업적에 대해 정리 해보려 한다.


첫째, 시킨대로 영업 제안서를 읽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둘째, 시킨대로 적당히 공유되어 있는 폴더를 열어보았다. 큰 의미는 없었다.

셋째, 일탈의 시작인 카카X톡을 설치했다. 물론 채팅방 스타일은 '엑셀 스타일, 투명도는 40%'

넷째, 그러나 아무도 내 카톡에 답장을 주지 않았다. 난 늘 준비되어 있는데.

다섯째, 광고주를 대상으로 한 '2017년을 되돌아보며' 감사 메일 작성. 비록 내가 이 회사에서 되돌아볼 2017년이라고는 고작 3일 뿐이었지만, 태연하게 1년을 돌아보는 척 해보았다.

여섯째, 다시 영업 제안서를 읽었다. 영업담당자가 아닌 것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사실 부끄러웠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봐도 업적은 커녕 이렇다 할 업무를 한 게 없었으니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분주하게 일하며 자기 역할 이상으로 일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난 그 원인이 내게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연말이라 다들 바빠서, 미처 날 보지 못했고(...) 그래서 챙기지 못한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 같은 인재(人材)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테니, 시간문제일까?


───그러는 동안, 몇 번의 낮과 몇 날의 밤이 흘러갔다.


2.

그렇게 3개월이 지났다!


...

......


회사는 나 같은 인재를 그대로 방치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이 회사 입장에서 난 인재(人材)가 아니라 인재(人災)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성장하지도, 발전하지도, 크게 달라지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깐.


만일 누군가가 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라고 묻는다면. 

─ 꿔다 놓은 보릿자루

─ 월급 루팡...은 아니고 월급 좀도둑

...

이런 식으로 답하지 않을까? 


사실 대학생 무렵엔 앉아서 숨만 쉬면서 돈 벌고 싶었는데, 실제로 가만히 앉아 숨만 쉬면서 돈을 벌어 보니 이건 이거대로 고역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너무 바빠도 우울하지만 쓸데없이 한가해도 생각할 시간이 많아 우울해지더라. 분명 3개월이라는 시간은 인생 전체로 놓고 보면 매우 짧을 테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게 있어선 영겁의 시간에 가까웠다.


...

......


그런데, 나 정말 3개월 동안 뭘 한 걸까?


물론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무언가 시키는 일이 있으면 군말 없이 처리했고, 남을 도와야 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왔다. 근무시간 중에 여유 시간(=대부분)이 있을 때면 회사 관련 업종 리서치(=시간 죽이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내용의 일을 했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을 정도로, 매일 매일이 따분하고 재미없고 감동도 없는 일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입사 일주일차에 느꼈던 고립감은 3개월이 되어도 여전히 짙게 깔려있었다.

언젠가 '고독은 익숙해지는 것의 문제지만 고립은 익숙함만으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왜냐면 고독하게 혼자 보내는 건 익숙해질 수 있지만, 주위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데 나 혼자만 홀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질 수 없어서... 그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를 놓고 본다면, 과연 나의 이 고립이 온전히 그들의 탓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업무적인 측면에서도, 인간관계적인 면에서도 내가 무슨 노력을 했었나? 주위 동료들과 연결되기 위한 사적인 노력도, 공적인 역할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이전에, 난 이 회사에 무슨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온 거지.

실제로 당시 난 나에 대한 무관심, 나의 무능력을 왜곡하여 주위 탓으로 돌렸다. '사람에 관한 일'을 해야 할 인사담당자가 주위에 벽을 쌓았고, 그 안에 자신이 갇히는 한심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잃어버린 3개월이었고, 회사에게는 3개월치 월급을 좀도둑에게 털린 상황이었다.

3개월치 월급이 일종의 신호탄이 된 걸까? 드디어 대표가 등판했다. 정확히는 나를 제법 포근해진 창고(회의실)로 불렀다.


...

......

거두절미하고 나에 대한 피드백 요점은 다음 한 마디였다.


'대기업에서 좋아할 거 같은 타입'

굳이 말의 의도를 읽어볼 것도 없이, 이 한마디가 나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어 그는 나에게 3개월 동안 스스로, 자율적으로 무엇을 했냐 물었다.

나는 나름대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두서 없는 얘기를 계속해서 늘어놓았으나, 그의 다음 한 마디는 반박할 의지를 모조리 깎아냈다.


"인사담당자로서 저보다 HR에 대해 훨씬 오랫동안 고민할 수 있었을 텐데, 그와 관련된 무언가를 시도한 게 있으세요?"


아, 나 이 회사에서 인사담당자였지.

입사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잊고 말았던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


스타트업 일원으로 합류하면서, 이들이 나를 위해 줄 수 있었던 건 교육도 사수도 아니었다.

자율이었다. 내가 책임질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두려운 나머지 무엇도 책임지지 않겠다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던 나의 권리.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단지 두려운 나머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을 뿐.

3개월 간 나의 역할, 나의 영역은 분명 존재했고 존중받고 있었으나 무엇하나 주도적으로 해보지 않았다. 입사 전,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은 굴림체 폰트 하나라도 바꿔봤던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별 볼일 없고 뻔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건 둘째치고, 어떤 발전도 없이 흐릿한 존재로 섞여 있었다는 것만으로 수치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딱 한 달만 주시겠어요? 제 가치를 입증해보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이대로 도망쳐 교육도 사수도 있는 만들어진 틀 위에서 일하는 것.

둘째, 이대로 남아 자율 위에서 나의 권한으로 그 틀을 만들어보는 것.

그리고 난 두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애초에 이러려고 스타트업 고른 거잖아?


비록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던 나의 스타트업 첫 시작은 처참하게 망했지만, 이대로 무능력한 존재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미련만큼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지켜볼게요"


3.

3개월이 지나고나서야,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 자율을 권리이자 기회로 삼았다. 인사업무는 구성원 채용부터 퇴직까지 관련 업무를 모두 처리하고 있는 만큼, 사실 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당장 눈에 띄는 채용 관련 업무부터 시작했다.

- 굴림체 폰트를 바꿨다.

- 채용 공고를 만들어보았다.

- 직무 별 적합한 채용 채널을 찾고 시행착오를 겪어봤다.

- 채용 전형 단계별 안내문을 만들었다.

- 과제전형 과제도 만들어 보고, 면접기록표도 만들어보았다.

...

- 회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유연근무제 설계에 참여했다.

...

...

인사담당자인 내가 채용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할 거라는 믿음은 내가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또한 별 거 아닌 작은 변화가 하나 둘 쌓이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자,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과 함께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기면 좋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시도하게 되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항상 회사에 득이 되는 건 아니었고, 의도와 달리 폐만 끼친 실수도 잔뜩 저질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회사는 실수를 하고 있다면, 그건 오히려 그거대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는 걸로 간주해 크게 욕을 먹거나 그러진 않았다.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조금씩 문제를 해결하고 제도를 개선하며 회사를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역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둘 찾았을 뿐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료들의 조언과 도움을 얻고 이런 과정에서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더 이상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책임질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율. 

그 자율 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고, 실행하고, 성과로 이어지는 경험은 만족감 그 이상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2020년 3월]
처음엔 채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동료들과 가까워지고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조금씩 '사람에 관한 일'인 인사(人事)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채용, HR Branding, 인사운영, 조직문화, 복리후생, 평가보상 등 기업의 생애주기에 따라 필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하나 하나의 고민과 노력이 모여 지금의 나는, 2년 전엔 결코 상상도 못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매번 헛소리만 늘어놓은 거 같은데, 세 번째 이야기인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제법 진지한 내용이지 않았나 싶네요. 


보통 대기업에 비해 스타트업은 채용과정에서 인사담당자의 권한이 비교적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저희 회사만 해도 업무 전문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무자 면접 전에 후보자와 회사 간 조직 적합성(Culture Fit)을 파악하기 위해 인사팀이 별도의 면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명의 인사담당자로서 전 크게 세 가지를 보는 편입니다.

첫째, 후보자의 신뢰성입니다. 구조화된 질문(흔히 꼬리물기라고 하죠)은 보통 후보자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후보자가 걸어온 인생에 거짓이 없는지 검증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이때 대답에 모순이 존재하거나,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준비된 대답은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둘째, 당연하지만 인성입니다. 당장 인력이 급한 실무진 입장에서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된다면, 태도나 성격 등의 문제는 용인하거나 미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다르고, 회사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사팀은 기질적인 문제가 생길 시 가차 없이 불합격을 시켜야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 하나는 주위를 모두 괴롭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셋째, 이번 이야기 주제이기도 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 즉,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회사를 위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후보자 개인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스타트업의 특징은 늘 구성원 수에 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새로 합류한 동료를 위해 기존 구성원이 하루종일 시간을 내줄 수가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입사자 알아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누군가 챙겨주길 기대하는 사람은 그대로 저처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업무적으로도, 인간관계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면 끝내 퇴사하고 말고요.


대기업 공채와 달리 스타트업 수시 채용은 체계적인 집단 교육도, 하루 종일 붙어서 날 못살게 구는 사수도 없습니다. 물론 회사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는 공유해줄 테지만, 그 이상으로는 스스로 알아보고 필요하면 질문해야 합니다. 물론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최선을 다해 도울 테지만, 기존 구성원들은 새로운 사람이 뭘 궁금해 하는지 전혀 관심없고 그런 거 궁금할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회사와 직무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면서 '나의 업무 영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내가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하고 책임진다? 주입식 교육을 거쳐 시키는 거만 해온 사람들에게는 생각 이상으로 부담되는 일이에요.


그래서 솔직히 전 자율성을 기회가 아닌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은, 저희 회사는 물론 자유로운 분위기의 스타트업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혹자는 "너도 원래 수동적이었다가 바뀌지 않았냐"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맞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우연한 계기가 없었다면 바뀌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이전에 3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솔직히 말해 인사담당자로서, 수동적인 사람을 채용해서 바꿔 쓰는 거보다 그냥 처음부터 능동적인 사람을 채용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스타트업은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은 어떻게 보면 맡고 있는 역할 안에서 누구보다 전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오래 고민하고, 또 고민한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와 의견을 쉽게 내려놓지 마세요. 그게 다르거나 틀릴 순 있어도, 옳지 않은 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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