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 남편과 사는 미니멀리스트 아내
미니멀라이프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 가장 큰 적은 바로 내부에 있다. 비우기를 한 번이라도 시도해보신 분들이라면 아주 공감할 것이다.
나는 어마어마한 맥시멀리스트와 동거하던 중 미니멀 라이프를 알게 되었고, 몇 년간 엄청난 전투 끝에 그래도 그와 나의 삶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나까지 버릴 거냐고 여러 번 물어봤던 나의 동거인)
오늘도 한차례 그와 나의 간극을 발견했는데,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를 블로그에 기록하면 나처럼 전쟁 중인 미니멀 동지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생각날 때마다 기록을 해보기로 한다.
공병수집러와의 전쟁
남편에겐 되게 특이한 버릇이 있다. 다 쓴 공병을 절대 제 손으로 갖다 버리질 않는다는 것. 약통, 화장품, 치약, 닳은 면도날 등 매일매일 쓰는 제품이고 사용주기가 좀 긴 녀석들이 대상이다. 예를 들어 치약이 잘 안 나온다 싶으면 바로 수납장에서 새것을 꺼내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나와의 간극이 두 가지 포인트 있다.
1) 사실은 다 쓴 게 아니다. 평균 2주 정도는 무조건 더 쓸 수 있음 ㅋㅋㅋ
2) 가끔 정말 쓸모를 다한 경우가 있는데, 공병 폐기를 안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8년을 살아도 그대로이고, 몇 번의 잔소리에도 고쳐지지 않아 서로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정리와 청소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물건이 두 개가 나와있으면 일단 잔여량을 확인한 후 바로 분리배출을 해준다. 남아있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빠르게 소진해준다 (새 거 좋아하는 남편은... 새 걸 뜯은 이후 헌것은 쓰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런 품목이 대부분 공용공간 (싱크대, 화장실)에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나의 눈에 띈다는 점.
하지만, 신랑만의 공간에 있는 공병은 세월이 흐른 후 나의 눈에 발견된다.
얼마 전 남편의 화장대를 정말 오랜만에 정리해주다가 발견한 슬리핑 마스크 (이것부터 나랑 다름. 나는 슬리핑 마스크라는 걸 쓰질 않는 여자... 남편이 화장품 회사에 다니던 시절 회사에서 특가로 세일한다며 주문한 것). 되게 꼬질 하게 방치되어 있길래 물어보니 역시나 다 썼단다. 일단 내 화장대로 옮겨주고, 저녁에 짜 보니 너무 잘 나오는데...? 이후 한 보름은 저녁에 로션을 조금 덜 바르고 이걸 도포하는 방식으로 너무 잘 썼고, 어제부터 잘 안 나오길래 개복 실시.
잘라서 들여다보니 일주일은 더 쓸 것 같다. 지겹지만... 슬리핑 마스크의 쓸모를 다 채워주기 위한 나의 노력.
맥시멀리스트 남편 손에 있었다면 분명 한 6개월 정도는 더 화장대에서 아무 쓸모없이 방치되어 뒹굴거리다가 이사 가기 직전 내 잔소리로 인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쓰다 보니, 공병 못 버리는 그의 습관이 사실은 제로 웨이스트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잔여물을 많이 남긴 채로 바로바로 버렸다면 제로 웨이스트 실천자인 내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 안의 내용물들은 쓰임을 다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겠지. (헉) 제때 못 버리는 습관이 이런 순기능을 하고 있을 줄이야.
배 가른 슬리핑 마스크로 저녁 기초를 마무리하다가 적어보는.. 맥시멀 리스트와 사는 미니멀리스트의 고군분투기 에피소드.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박스 못 버리는 남자, 설명서 못 버리는 여자 등 각자의 가정에서 다양한 수집러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비슷한 애환을 가진 분들을 찾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