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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Oct 07. 2019

덕후

  덕후. 이 단어는 오타쿠에서 발원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 상품을 소비하며 행복감을 얻는 개인을 일컫는다. 덕후의 방점은 소비 대상이 아닌 '소비'에 찍힌다. 생산이나 창작이 아닌 소비를 통한 행복. 그래서인지 덕후라는 명사의 바탕에는 암묵적인 죄의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도 덕후는 보통 부정적이고 희화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이러한 죄의식은 어디에서 나올까? 여러 원인이 있을 테지만 아마도 생산과 효율을 강요하고 떠받드는 자본논리도 한몫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소비는 생산의 결과이자 목적이다. 선 생산이 있어야 후 소비가 가능하지만,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있을 수 없다. 소비로 인해 자본주의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소비를 장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한 요소에 불과한 생산만을 신성화하고 소비를 경시하는 풍조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부정한다.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는 생산과 소비를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모두가 생산자고 동시에 소비자다. 생산과 창작에서 기쁨과 희열을 얻든, 소비에서 만족과 행복감을 얻든 그건 우열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개인의 선택이지, 비난받을 성향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덕후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덕후들이여. 이제 당당히 덕밍아웃을 하자.


  사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정작 나 자신이 덕질을 긍정하지 못하게 때문이다. 나는 게임을 한다던가 만화를 본다던가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몹시 즐겁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늘 편두통 같은 불편감을 느낀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마냥 탕진해도 괜찮은 걸까. 이 시간에 책이라도 한 권 더 읽고 글이라도 한 편 더 쓰거나 그도 아니면 차라리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씨앗과 같다. 어릴 땐 어쩌다 과일의 씨앗을 삼키면 그것이 몸 안에서 자라나 줄기와 가지가 목을 뚫고 나올 거라는 생각에 며칠을 불안에 떨곤 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생각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몸통을 키우고 가지를 뻗쳐 내면을 잠식한다. 결국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즐거움은 날아가고 시간을 허투루 낭비했다는 자괴감만 남는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무언가 생산적인 일로 돌아간다. 하지만 생산과 창작에는 노동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지만, 단맛은 한순간이고 인내는 길다. 게다가 요즘은 인내가 꼭 열매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부린다. 먹고살기 위함만은 아니다. 생업활동 이상의 무언가를 행한다. 왜일까. 생산과 창작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함은 아닐까. 그렇게 사랑받으려는 안간힘은 아닐까. 하지만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나는 그저 나일 뿐이고 또한 정형화된 무엇이 아니다. 모든 개인은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 같은 존재다. 그렇게 유동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부동의 공식은 없다. 어떤 공식으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증명은 무효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자기만의 언어를 찾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에 자신을 알린다. 아마도 외로워서, 온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듯한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서일 것이다. 이 모든 사는 일이 결국 외로움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면 허망함이 밀려온다. 결국 생산과 창작에도 오롯이 몰입하지 못한다. 생산과 덕질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이런 나는 미숙한 생산자이자 어리숙한 덕후다.


  나와 비슷한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 있다. 불후의 고전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은 딜레당트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부유하지만 그 재산을 굴리는 일에는 서투르고 열정도 없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식과 학문이다. 여기까진 나와 다른 부분. 그에게 있어 삶은, 온몸으로 살아내는 무엇이 아니라 관찰하고 해석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의 질료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며 세상을 강박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다. 나와 비슷한 부분. 그가 유지하는 세상과의 거리와 태도는 작가로서 불후의 작품을 남겨보려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잊히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나도 다르지 않다. 불후의 작품을 남기겠다는 야망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노력도 하지 않지만, 누군가 나의 남다름과 특별함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때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생각을 다듬고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위트와 허세를 섞는다. SNS에 사진도 올리고 글도 올린다. 누군가 내 글과 사진에 '좋아요'나 호의적인 덧글을 남겨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사진이, 글이 순수하게 좋았던 것인데, 어느새 점점 더 많은 '좋아요'와 덧글을 받기 위해 사진을 고르고 글을 짜맞추는 자신을 발견한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사람이나 사물 풍경이나 현상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한 채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어떻게 표현하면 더 좋은, 더 많은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삶의 현장에 오롯이 몸담지 못하는 것이다. 한 발만 슬쩍 들이밀고 있는 꼴이다. 나는 이것을 작가(는 아니지만)적 딜레마라고 부른다.


  작가적 딜레마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케빈 카터가 아닐까. 케빈은 사진이라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증명하는 사진작가이자 프리랜서 기자였다. 어느 날 케빈은 황무지 바닥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놓여 있는 피골이 상접한 아이와 아이 주위를 서성이는 독수리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구도를 생각하고 피사체와의 거리와 초점 노출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수단의 굶어죽어가는 소녀>라는 사진으로 케빈은 퓰리쳐 상을 수상하고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곧이어 거센 윤리적 비판이 뒤따랐다. 위험에 처한 아이를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었다. 실은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고 아이 엄마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던 중에 힘에 부쳐 잠시 아이를 내려놓은 상황이었음이 밝혀졌지만 비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케빈 본인도 양심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은 비단 케빈 카터의 일만은 아니다. 예로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물론 그러한 불행의 원인이 '작가적 딜레마' 뿐만은 아니겠지만 비극을 완성하는 하나의 원인임을 부정할 수만도 없지 싶다.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작가적에 딜레마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고민을 읽었다. 그 고민의 돌파구로 탄생한 인물이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 조르바가 아닐까. 조르바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조르바는 태생이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 가진 건 건장한 몸뚱이뿐이고 그 몸을 굴리며 닥치는 대로 살아왔다. 거창한 이념이나 합리적 이성,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나 지식 등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런 것들로 사물을 보거나 타인을 재거나 삶을 가공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조르바는 날것의 삶을 즉흥적으로, 온몸으로 살아내는 인물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 주인공이 창작의 고통 속에서 글을 쓴다면 조르바는 삶의 희열 속에서 춤을 춘다. 만약 주인공과 조르바 앞에 바다가 있다면 주인공은 해변에 앉아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헤엄을 칠 것이다. 주인공은 삶을 보았고 조르바는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르바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인생 덕후. 내게는 조르바 비슷한 친구 J가 있다. 조르바처럼 야성적인 삶을 사는 건 아니지만 행위가 순수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J는 진정한 덕후다. 게임 드라마 영화 스포츠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한 번 빠지면 몇 날 며칠 때로는 몇 달 동안 자발적으로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문화 상품을 순수하게 소비하는 데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다만 즐거워할 뿐이다. 가령 드라마를 볼 때는 그냥 본다. 드라마를 보며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감상을 받았는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따위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오로지 작품이 주는 즐거움에만 도취될 뿐이다. 나는 J를 늘상 덕후라고 놀리지만 나는 사실 J의 오롯한 덕력이 부럽다. 어린아이처럼 오로지 대상과 현상에만 몰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덕력은 재능이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고 쉼 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나에게는 결핍된 능력이다.

 

    휴무를 몰아서 5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기엔 짧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다. 이럴 때 내가 덕후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J처럼 아무런 죄의식이나 일말의 표현 욕구 없이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하여 내 시간을 순수하게 소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처럼 이 시간을 어떻게 '이용'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조르바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치의 행복이라는 게 있다. 백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엇도 판단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골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백치는 바람에 날리는 꽃잎만 보아도 누구보다 뛸 듯이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그런 백치를 보며 어쩌다 저렇게 됐을꼬, 혀를 찬다.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주 생각한다. 어쩌면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백치를 불쌍하게 여기는 우리가 아닐까. 백치까진 아니어도 덕후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타인에 대한 의식 없이 행위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에 오롯한 행복감을 느끼는 덕후가 되고 싶다. 글도 그렇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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