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나 Oct 09. 2019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난은 울타리이다. 크지 않은 원을 그리고 있는 이 벽에는 문이 없다. 가난은 그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자유를 앗아간다. 가난이 빼앗는 자유 중 가장 아픈 자유는 일하지 않을 자유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한시도 일을 놓을 수 없다. 일의 대가가 주어지지만 필수 생계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적자를 내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삶이다. 공과금 내기도 빚을 갚기도 빠듯한 삶, 진짜로 하고 싶은 일 정말 필요한 것 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로 미뤄진다. 내일은 오지 않는 미래()다. 오늘도 가난의 막혀 도래하지 않는 희망이다. 가난이라는 벽은 이렇게 높다랗고 두텁다. 하지만 월담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숟가락 하나로 십수 년 동안 벽을 파서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다. 그 정도의 인내와 노력에 약간의 운도 따라준다면(탈옥을 시도하던 밤 번개가 치지 않았다면 탈옥은 실팼을 것이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가난보다 가난한 것이 있다. 빈곤이다. 가난이 울타리라면 빈곤은 울타리 중앙에 있는 늪이다. 늪은 한 번 빠지면 자력으로는 헤어나올 수 없다. 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빨려들 뿐이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거나 밧줄이라도 던져주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하지만 늪에 빠진 이를 선뜻 구해주려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를 구해주려다 자칫 자신도 늪에 빠질지도 모르니까. 그런 이들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우선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자 생물의 생존본능인 까닭이다. 하지만 내 목숨을 던져 타인을 구할 순 없어도 최소한 그곳에 늪이 있다는 표식을 달 수 있진 않을까. 그렇게 누군가 늪에 빠지는 일을 예방하고, 그럼에도 누군가 늪에 빠질 경우를 대비해 구조를 위한 인력과 밧줄을 예비할 순 없을까. 이렇게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일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국가의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저의 의무를 잘 이행하고 있을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 물음에 No,라고 대답한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이하 댄)는 평생 목수로 일하며 납세의 의무를 다한 모범시민이자 어려운 이웃에게는 없는 돈까지 털어 도움을 아끼지 않는 따뜻한 이웃이었다. 댄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성실히 일한 돈으로 자기 집을 장만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댄을 가난으로 끌어내린 것은 질병이었다. 먼저 아내가 치매에 걸려 십수 년 투병하다 숨을 거두었다. 치료와 간병비로 많은 돈을 썼을 텐데, 댄 자신도 심장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대로 중산층으로 살다가 가난의 울타리 안으로 던져진 거였다. 댄은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가난의 중앙으로, 그곳에 있는 늪으로 밀려나다가 이윽고 진창에 빠지고 만다. '늪지 주의'라는 표식은 무용했고, 댄과 같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배치된 인력들은 오히려 댄을 늪에 가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댄은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빨려들었고 결국 심장병이 재발해 숨을 거둔다. 댄의 물리적 사인은 심장발작이지만 보다 적확한 사인은 익사가 아닐까.

   

   카메라는 댄의 가난한 삶과 빈곤한 죽음을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관망한다. 마치 댄의 몸부림을 외면하고 냉대하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그렇게 빈곤을 완성하는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빈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시선이라는 듯이. 그렇게 영화는 역설적으로 말하는 듯싶다. 가난은 개인의 문제일 수 있지만 빈곤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어쩌면 빈곤의 해결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댄이 남긴 유서를 정독하고 마음에 깊이 아로새긴다면...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묵정원9-번짐 /장석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