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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Aug 04. 2019

수묵정원9-번짐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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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정원9ㅡ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2001년.


번짐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수통에 떨어지는 물감이다. 어떤 색이라도 좋다. 어떤 색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한 가지 색을 정해보자. 제가끔 애정하는 색으로. 나는 하늘색이 좋으니 그걸로 상상해본다. 손가락 크기의 튜브에서 떨어져 나온 속손톱 만한 하늘색 물감은 물에 닿자마자 점성을 잃고 연기처럼 구름처럼 유연하게 번진다. 원래 형태를 잃고 본래 색조를 잃는다. 번짐은 이렇듯 자기 상실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번짐의 미학이 있다. 물감은 물을 만나 다른 농도와 질량, 다른 채도와 색감을 가진 전혀 새로운 물질이 된다. 뚜껑 닫힌 튜브 채로 물에 떨어졌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다. 이렇듯 번짐이란 자신과의 분리이자 타자와의 동화이며,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의 탈바꿈이다. 결국 소통의 방법론인 것이다. 겨우내 애써 피워 올린 꽃잎으로 번지며 봄은 여름이 되듯이, 나는 나를 버려야 네가 되고, 너는 너를 놓아야 내가 된다. 번짐으로 우리는 만남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번져야 사랑이다. 사랑은 번짐이다. 번지지 못한 지난날의 무수한 내가 나에게로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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