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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Jun 11. 2019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내멋대로 시해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시 [그 여름의 끝]의 교과서적인 해석은 '시련의 극복을 통한 생명력의 회복'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시가 자꾸만 그냥 연애시로 읽힌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에서 시작되는 연애시 뉘앙스는 서간체 문장을 읽으며 한껏 진해진다.


여름 나무 백일홍과 '그' 여름 나무 백일홍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있다. 전자엔 일반적인 진리가 있고 후자엔 단독적인 진실이 있다. 지시대명사 '그'는 보통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 특정한 대상에 붙인다. 그러니까 '그 여름'의 이야기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앎'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과거에 경험했기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이며, 함께 겪었기에 마침내 '여름' 앞에 '그'라는 지시대명사를 붙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여름'은 당신과 내가 함께 했던 지나간 언젠가의 여름인 것이다.


이런 전제로 시를 다시 읽으니 시의 시제가 사뭇 중층적이다. 함께 했었던 과거완료형 '그 여름'이 있고, 혼자 찾아간 과거형 '그 여름이' 있고 '그 여름'들을 회상하는 현재진행형 '이 여름'이 있다. 과거완료형 '그 여름'엔 폭풍이 불지 않았었나 보다. 그렇게 당신과, 당신의 당신의 사랑도 무풍지대에서 순탄했었나 보다. 하지만 당신 혼자 찾아간 과거형 '그 여름'엔 수차례 폭풍이 몰아쳤나 보다. 이별에 절망한 나와 당신,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한없이 더디게만 지나가는 폭풍처럼.


폭풍에도 꺽이지 않고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다는 백일홍 나무를 보며 화자의 절망이 '장난'처럼 매단 붉은 꽃들은 희망이었을까. 어딘가에서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을 그에게 혹여라도 부담이 될까 봐,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도 결국 백일을 넘지 못하고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으며 모든 잎을 떨구듯이, 회의적이기만 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가 좌초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 위해 '장난처럼' 기다렸을까. 하지만 장난을 가장하는 마음은 장난이 아닌 것만 같아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다는 독백이 아프다.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으니 희망도 모두 져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이 여름이 떠나자마자 철새처럼 도래하고 있을 새 여름은 완전한 미지다. 언젠가 와 있을 '그 여름'에 나와 당신은 또다시 사람에 치이고 사랑에 넘어지고 삶에 절망할지 모른다. '그래서' 삶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절망은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희망들을 '장난처럼' 매달 것이니까. 절망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미지 출처 : 경기도 농업 기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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