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과 Nov 08. 2021

리필 - 이상국

소비와 소모 사이

https://pixabay.com/images/id-3025022/


리필 - 이상국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 하루하루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A 있다. 그는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휴지처럼 풀어 쓰고, 심지어 그냥 버린다. 저기 하루하루를 힘들다고만 느끼는 B 있다. 그는 힘든 하루하루를 종이에 빼곡히 과제를 쓰듯 적고 그걸 모은다. A 하루를 마냥 소모하고, B 같은 시간을 소비한다. 소모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소비는 다른 무언가로 바뀐다. 그래서 소모는 낭비, 소비는 교환이다. 교환의 권력,  돈이 지상 최고의 덕목이 되어버린 요즘 A 루저이고, B 위너가 된다. B A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하루하루를 소모만 하니?


이에 대해 A 아름다운 시로 답한다. "우주는"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 그래서 봄은 해매다  봄이고 /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수밖에 "다고. 이토록 아름다운 변명이라니. 어디 봄만  봄일까. 아침에 떠지는 눈으로 차오르는 날이  날이요,   속으로 쏟아지는 빛이  빛이요,  빛속을 걸어오는 만남이 모두  만남이다. 하루의 끝에헤어지는 모든 이별이 또한  이별이다. 그렇게 오늘의 모든  새롭고 낯설게 맞이하는 당신이 날마다 새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그걸 잊고 사는 듯하다.  봄에 잠깐 설레고, 첫눈이   잠깐 마음이 환해질 , 나머지 날들은 그날이 그날이다. 나만 그런가?


'소모'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창의적 창조와 효율적 생산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나마 있는 것마저 효용 없이 써서 없애는 행위는 "쯔쯔, 쓸모 없는 "이란 소리 듣기  좋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어떤 반론을 펼쳐봤자 그건 패배론일밖에. 그런데  리필론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계속 "리필" 리필하게 된다. 아마도  설득력의 방점은 "부지런히" 아닐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냥 게으르게 흘려보내는  아니라, 매순간의 아름다움을 알고 느끼며 그걸 "부지런히" 풀어쓸 , A 내면에는 선명한 소모의 경험과 즐겁고 아름다운 생이 자리할 것이다. 무엇도 남기지 않는 낭비라고 여겼던 소모적 태도가 "부지런히" 만나 아름다운 삶을 남기는 "창조" 승화된 것이다. 그래서   [리필]  봄이 오고 첫눈이 내릴 때처럼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리고 다짐케 한다. 나도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써야"겠다고.


"A 옳았고 B 틀렸다" 말은 아니다. 중요한  역시 하루하루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 “부지런히삶을 살아내는 것인 듯하다. 그럴  있을  죽음의 끝물에 닿아도, 마치  해동안 일군 황금빛 들녘을 바라보는 농부처럼, 자기 생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을  있지 않을까.


한 줄 오독평 "리필"할수록 자꾸 어제와 오늘에 대한 반성을 리필하게 하는 시 [리필].

매거진의 이전글 먼 곳 - 문태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