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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Oct 20. 2018

파란 하늘과 보라빛 노을 그 사이



 

 전망대를 좋아했다. 굳이 전망대가 아니더라도 어딘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이 있다면, 놓치지 않고 올라서려 했다. 눌러두었다고 생각했던 내 욕심과 조급함이 여기서 이렇게 티를 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 장소에서 한 눈에 많은 것을 보겠다는 그런 욕심.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었다. 높은 곳을 오르느라 조금 숨이 찬 상태에서 고개를 들었을때 보이는 풍경에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방금 전까지 서 있는 곳이 하늘 아래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그 자체로 잠깐이나마 이 곳을 눈으로, 마음으로 가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위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작아지는 풍경이 좋았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는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성벽 높이 만큼 하늘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햇살도 강렬했다. 조금이라도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벽을 올랐지만, 해는 이미 이 곳까지 닿은 후였다.


지붕 없는 성벽위에서 이따금씩 눈을 뜨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을 감기는 더 어려운 풍경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빨간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베이지색을 띄는 거리와 계단이 서로를 잇고 있다. 성벽을 경계로 바깥쪽은 푸른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 회색 성벽을 사이에 두고 빨갛고 파란 물감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칠해져있다. 빛이 비출때마다 채 마르지 않는 물감 위로 반짝거림이 묻어나듯 반짝거렸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벽은

이제 이 곳이 지닌 아름다움을 감싸는 길이 되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 빨간 지붕과 오래된 돌길, 파란 하늘과 그만큼 파란 바다가 나를 따라 온다. 그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푸르던 하늘과 바다, 빨간 지붕과 지붕 사이에 걸린 빨랫줄, 좁은 길목마다 드리워진 그림자, 미로같은 길위를 지나가는 발걸음,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빨랫줄에 걸린 흰 천이 따라왔다.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도시가 보이고 그 도시의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의 삶까지 살짝 엿볼 수 있다. 그러다 '그런 삶이 혹 내 삶이 된다면' 하고 막연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아침이 오면 창문을 열고, 모닝콜이 아닌 아침햇살에 눈을 찌푸리고, 좁은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다 바다에 뛰어들고, 쨍쨍한 햇살 아래 이불을 너는 그런 상상.





어떤 장소를 여행하는게 아니라 어떤 작품을 만난 느낌이다. 구름 한 조각, 지붕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작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본 풍경들을 네모난 액자에 담아 내 마음 한 켠에 걸었다.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길이 였지만 성벽에서 내려오니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만큼 부지런히 걷지 않고 멈춰 서있기를 반복했다는 것 같아 뿌듯했다. 느릿느릿함에 뿌듯할수 있는 건 오직 여행에서만 가능했다.











 

 

 내려다 보기만 했던 바다에 몸을 담그기 위해 해변으로 향했다. 맨 발에 닿는 모래들이 따가웠다.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푸른 바다가 내 종아리 밑에서 찰랑 거렸다. 생각보다 차가운 바닷물에 모래 위에서와 달리 천천히 움직이며 바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닷물이 허리보다 조금 높은 높이까지 왔을때,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바닷 속에서 본 바다는 더 넓었다. 마냥 파랗기 보다 햇살과 그림자에 따라 여러가지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속에 담긴 내 발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았다. 그런 바다 속에서 수영을 잘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떠있는 것 뿐이었다. 약간의 발장구를 치거나 파도의 움직임을 느끼는 정도였다. 지금 이 모습이 내 삶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삶을 ‘사는’게 아니라 그저 삶이라는 망망대해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기 두려워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면서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거리에 있었다. 삶을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은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발장구를 치거나 팔을 휘휘 내젓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남는 건 더 지친 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떠있기만 해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 바닷 속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 뿐. 그 물이 얼마나 차갑고 맑은지 직접 느꼈다. 내 손과 발로 그 물을 어루만졌다. 아드리아해 그 푸른 바다를 직접 만나봤다.


이 상태로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온전히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물에 젖어 빨랫줄에 널린 빨랫감 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지금 나의 몸을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이 조금 약해지고, 노을이 지기 시작할때 쯤 스르지산에 오를 예정이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구시가지를 내려다 보거나 그 속에서 올려다보았다.


차가 멈춰서고 약간의 돌길을 지나자 성벽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구시가지가 동그랗게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와!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해는 푸른 바다의 지평선에 가까워지며 오늘의 마지막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 햇살과 푸른 바다에 둘러쌓인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런 풍경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주변 사람들의 감탄사도 하나둘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설레이는 발걸음과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전율과도 같은 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 내렸다.

이 풍경은 곧 과거가 되어버릴 '지금'이 주는 것이었다. 다시 이 곳을 오게되더라도 지금의 풍경과 같을 순 없다. 이렇게 올라서 밑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깎여진 돌, 마을을 형성한 사람들, 지구의 자전이라는 시간이 주는 해의 위치, 오늘의 맑은 하늘, 그 위에 제멋대로 그려진 구름, 잔잔한 바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 까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주는 풍경이었다.

지평선에 걸린 해를 중심으로 붉은 빛이 퍼져나가고, 그 빛의 끝에서 어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빛 사이로 푸른 하늘을 엿볼 수 있는, 해가 지기 전 짧은 오늘의 노을이었다. 이렇게 하늘과, 바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 찾아오는 낮의 끝자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니.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해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할때까지 하염없이 앉아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낮과 밤 그 사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노을이 자신 같아서, 다가올 어둠밖에 남지않은 자신의 모습 같아서 노을을 바라보면 하염없이 슬프다던 말이었다. 그는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가는 나이였다.



황혼의 사전적 정의는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또는 그때의 어스름한 빛'이다. 딱 지금의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짧은 황혼 뒤엔 분명 어둠뿐이지만, 황혼이야 말로 하루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빛이 물러가고 어둠이 다가오는 순간이면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빛과 어둠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 가지 색이 아닌 총천연한 색깔이 뒤섞인 하늘색은 황혼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할 건 그 뒤의 어둠 대신 지금의 빛을 바라보는 일 뿐이다.




아직은 멀어보이는 내 황혼도 언제 이만큼 왔을까 하며 맞이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지금이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그렇게도 찬란히 빛 났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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