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을 넘게 날아와 런던에 도착한지도 25일이 넘은 지금, 또 한 번의 비행을 앞두고 있다.
국내선이라 이렇게 일찍 출발할 필요는 없었지만, 여행을 시작하던 그 날처럼, 넉넉한 시간을 두고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했다.
널널한 시간 덕분에, 공항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따라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가 경쾌하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 혹은 이미 떠나왔던 사람들 손에 들린 묵직한 가방 안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설렘과 아쉬움 둘 중 무엇이 더 클까.
공항에선 비교적 먼 만남과 이별이 교차한다. 머나먼 곳으로 떠나면서, 오랜시간 떨어지게 될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나쳐 간다. 그동안 난 공항에서 누구를 떠나보내기 보단 내가 떠나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공항엔 이별의 아쉬움보단 곧 다가올 만남의 설렘이 더 오래 머물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그레브 공항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보단 떠나온 것에 대한 그리움에 가까웠다.
한국을 떠나던 날, 햇빛이 들어오는 정오의 공항 안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작지만 비슷한 모습을 한 공항 안에, 까무잡잡해진 피부와 조금 묵직해진 배낭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없는 '내'가 있다. 그래서인지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렸던 그 날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떠나게 될 것이 아닌 떠나온 것을 그리워했다.
그것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인지, 날 반겨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인지, 지금껏 떠나온 곳을 향한 그리움인지, 벌써 반이 지난 여행에 대한 그리움인지, 더 충분히 느끼지 못한 감정에 대한 그리움인지, 내가 꿈꿔웠던 여행에 대한 그리움인지, 혹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해 온 여행들에 비하면 그렇게 먼 곳도,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공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설레임과 아쉬움의 감정이 교차했다.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짐을 들고 일어섰다. 기다림밖에 남지 않아 조용한 이 곳에 다시 설렘과 긴장, 어색함과 익숙함 등의 여러 감정들이 사람들의 움직임과 함께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틈에 서서 나도 다시 배낭을 고쳐맸다.
어쩌면 여행 중엔 마주치는건
낯설고도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우연히 마주친
보통의 감정 일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파랗고 하얀 구름이 예쁘게 묻어있었다.
좋은 비행이 될 것 같았다.
좋은 여행 중이었다.
푸른하늘과 푸른바다가 하얀 구름으로 경계지어진 곳을 지났다. 땅에 가까워질수록 비행기 소음과 함께 두근거리는 소리도 커졌다. 도착한 공항에선 설렘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로 향하는 버스를 탈 땐 운전자 쪽 창가에 앉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방향으로 앉으면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구시가지의 빨간 지붕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시가지에 가까워질수록 파란 아드리아 해와 그 곳을 감싸는 빨간 지붕들이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리는 풍경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린지 오래지만 아직도 하늘을 두둥실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떤 해안도로보다 아름다웠던 곳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변함없었다.
안녕 두브로브니크!
내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티비를 보며 ‘꼭 갈게’라고 꿈꾸었던 곳이 이렇게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꿈이라는건 현실과 닮아갔다. 내 앞에 펼쳐진 풍경처럼 반짝거리거나, 원대한 꿈을 꾸지 않았다. 매일 마주하는 현실과 닮은 꿈을 꾸었다. 그건 꿈이 아니라, 꿈을 꾸는 법을 잊은 내가 꿈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가끔 잠결에 꿈을 꾸는 것처럼 가끔 꿈을 가졌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꿈을 꾸었던 사실조차 희미해지듯 그렇게 잊어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뤘다. 그것도 이토록 생생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게.
짐을 풀고 숙소 밖을 나서니 해는 이미 저물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서 두브로브니크의 모든 것을 보고 싶다는 조급함을 눌러담고 오늘은 그냥 천천히 두브로브니크의 저녁과 밤을 바라보기로 했다.
부자까페에 앉아, 두브로브니크의 해가 저물고, 쪽빛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는것 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틈틈히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기억에 남는건 저 멀리서 부터 다가와 나를 스치던 바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 소리, 푸른 바다, 일렁이는 물결, 작아지는 해를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해 나는 매번 ‘그 곳’에 있었다. 그동안 난 내가 서있는 곳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을 온전히 느끼는 순간만이 내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부질없지만, 나에가 닿고 내가 존재하는 '지금'을 할 수 있는한 오랫동안 움켜쥐고 싶었다. 앞으로의 모든 지금이 지금처럼 되기를 바랐다.
비로소 캄캄한 어둠이 내려 앉았을때, 멀리 밤하늘 위로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어두워질수록 카페 주변에 있던 빛들은 더욱 환해졌기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별보는 것을 좋아해서 밤하늘을 좋아하는 나였는데. 그동안 땅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느라, 정작 하늘에서 빛나고 있던 별빛은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의 불빛들을 피해 바위 밑으로 내려가 오로지 밤하늘만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그리고 밤하늘이 눈에 가득 담겼다고 생각했을때,
쏟아져 내릴것 같이 많은 별들이 이미 내 눈에 가득차있었다. 이만큼 많은 별들을 본 게 얼마만인지. 아니 처음인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행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한 번씩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에 벅차올라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했다. 난 종종 말을 잇지 못하고, 가족을 떠올리고, 우뚝 멈춰서고, 감격하고,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눈물을 흘린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을 수정해야할 것 같다.
지금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저 캄캄한 밤하늘과 별들이었지만 눈물이 났다. 이 곳에 오직 밤하늘과 별 그것들에 둘러쌓인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밤하늘은 크기를 가늠할 순 없는 어둠으로 뒤덮여있고 그 곳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흩어져 빛을 내고 있었다.
별빛 덕분에 밤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이 있기에 그 곳을 제외한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 밖 우주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지구 위에 산다는 건 평생 동안 우주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지만, 오늘 처음 내가 이 우주에 한 부분이라는걸, 어둠과 빛에 둘러쌓여 실감했다.
'.. 내 생에 처음으로 이토록 많은 별들을 본 날로 기억 될 그런 밤하늘이었다.
은하수안에, 우주안에 풍덩 빠진 기분이었다.
오늘은 정말 기억해야겠다.
근데 이 밤하늘을 사진으로 담기에는 카메라가 턱없이 부족하니
눈으로 담고 그림으로 그리자. 날짜를 쓰자. 좋았다라고 쓰자.
-2017.07.26 두브로브니크 첫날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