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트비체는 너무 커서 한 번에 둘러보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간다. 코스를 고르는건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사람들이 괜찮은 코스를 추천해준다. 나는 가장 보고 싶은 곳이 있었고 그 곳이 포함된 코스를 선택하면 됐다. entrance 1 -> P3 -> P2 -> St3 -> St1 -> Entrance1 코스였다.
아침 일찍 부터 출발했지만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매표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게 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긴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40분을 넘게 어쩌면 거의 1시간동안 기다린 끝에 표를 살 수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사람이 너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대부분 정해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여행객들이 많이 모인 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다행이었다.
드디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입장했을때의 두근거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목 앞에 선 기분이었다. 이리저리 엉킨 사람들과 소란스러운 소리들 그리고 그늘진 매표소를 사이에 두고 이 곳과 저 너머가 경계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늘을 벗어나 한 발을 내딛었다. 입장표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우거진 초록과 그 사이를 흐르는 에메랄드 빛 호수, 그 위를 나무로 덧대어진 길들이 좁지만 길게 늘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서 있었다.
디즈니 영화를 모두 좋아하지만 그 중 ‘곰돌이 푸’를 가장 좋아했다. 아직도 비밀번호 설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이라는 질문에 '푸'를 적곤 한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크리스마스날 받았던 푸 봉제인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푸 자체보다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푸의 삶을 좋아했던 것 같다. 숲 속 나무 집에서 살며, 아침이면 새들이 지저귀고,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너른 들판이 있고, 조금만 더 멀리가면 모험이 되는 우거진 숲이 있으며, 목을 축일 수 있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던, 그 배경 삽화들이 주는 풍경이 좋았다. 언젠가 푸를 찾아가겠다고, 그래서 나도 함께 살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리고 이 나무 다리 위에서 그 다짐이 문뜩 생각났다. 언젠가 가겠다던 그 곳에 와있는 것 같았다.
길이 좁거나 구부러진 곳이 많았다. 그런 곳을 많은 사람들과 지나가기 위해서는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수 밖에 없다. 잠깐 멈춰서도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멈추게 된다. 그래서 카메라를 드는 순간보다 내려 놓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카메라로 담기에 역부족인 풍경들이었다. 종종 걸음을 걷게 되어도 괜찮았다. 저절로 조심스러워지고 소근거리게하는 공간이었다. 이 순간 처럼 내가 관광객이라는 역할에 충실했던 적은 없었다.
이 곳에 살고 있는 어떤 존재들의 공간을
짧게나마 엿볼 시간이 허락된 느낌이었다.
하늘도 나무들도 물들도 너무도 파래서, 현실감각이 없기도 했다. 정말로 이 곳은 다른 세계였다. 난생 처음 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둘러싸인 곳이었다.
5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걸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5시간 동안 뱉었던 말들은 '와..' '정말,' '예쁘다.' 등의 단말의 감탄사들 뿐이었다. 그 풍경을 묘사할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이런 말들이 그 곳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단어이기도 했다.
모든 곳들이 말 그대로 ‘와 정말 예쁜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보고싶었던 모습은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볼 수 있었다. 몇 시간 전만해도 저 다리 위를 직접 거닐었다. 그럴때마다 푸른 빛이 내 주위를 감싸며 따라다녔다. 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나를 감싸던 풍경이 얼마나 크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에 비해 사람들은 매우 작았다. 어쩌면 이 곳에 사는 작은 존재들은 여기서 바라본, 이제 막 입장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이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저 곳에선 그저 한 없이 푸르게 보이던 것들 역시 제각기 다른 색깔을 내고 있었다. 길을 따라 묵묵히 걷다보니 어느새 그 속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만큼 많은 것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이 곳과 작별할 시간도 가까워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곳을 다녀 갈 수 있어서, 이 깊고 넓은 곳이 주는 푸름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좋았다. 매우.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플리트비체를 거니는 꿈을 꾸었던것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꿈보다도 더 꿈같았던 곳이었다. 갑자기 저 나무 밑에서 꿀을 뒤집어쓴 푸가 튀어나오더라도, 얇은 날개를 펄럭이는 요정들을 발견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곳.
그런 곳이었다. 플리트비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