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이 어쩌다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차고 넘치는 글
예전부터 자기소개서를 쓸 때 내게 가장 힘든 일은 내용을 채워 넣는 것이 아닌 300자 내로 간결하게 핵심을 담아 적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 만들어내는 결과물도 말이 많다.
게임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방대한 양을 무턱대고 쓰는 바람에 그것을 읽는 팀원들은 꽤 고생을 했었다.
외주로 제작되는 게임은 역사적 사실 및 인물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아 내 안에 설명봇이 작동한다.
콘셉트, 주제가 담긴 개요인 1차 제안서가 만들어질 때는 그래도 딱 읽기 좋은 정도로 써진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화면 기획서를 작성하면서 글이 무한으로 늘어난다.
디자이너에겐 3줄 이상이 되는 글을 읽으면 울렁거리는 병이 있는데, 특히 내 글을 읽을 땐 심해진다고 한다.
주인공 대사, 게임 진행 멘트, 퀘스트 지시 및 안내 등의 내용이 작은 핸드폰 사이즈 내에 모두 담겨야 하기에
글 덜어내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디렉터님은 사람들을 못 믿는 게 아닐까요?
1차 기획안을 팀원들에게 공유한 어느 날 개발자가 내 자리로 와서 아주 진지하게 물어본 말이다.
"네?? 그게 무슨..??"
대화의 전말은 전날 게임 속 지시문을 줄이고 대체할 효과, 버튼에 대한 주제로 대화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개발자와 나는 팽팽한 대립구도를 이뤘었는데...
그는 게임 백과사전답게 다양한 게임 속 사례들을 보여주며 불친절한 게임들을 소개해줬다.
장황한 설명을 대신해 다양한 효과를 써서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게임들
하지만 원체 TMI설명봇인 난 '지시문 생략'이 어렵게만 느껴졌고 그렇게 못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대화는 끝이 났었다.
그리고"사람들을 못 믿는 게 아닐까요? "라는 그의 질문은 전날 내 의문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개발자의 설명을 빌려보면, A라는 사람에게 흩어진 선을 모아 별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주었을 때 난 A의 손을 잡고 하나하나 모아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언뜻 보기엔 매우 친절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이는 어쩌면 A가 만들어보기도 전에 A는 스스로 별을 만들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을 해버리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 내 무의식 깊은 곳엔 게임을 하는 유저들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내 가이드 없인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하고 있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뜨끔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도
생전 처음 접하는 게임을 할 때도 우리는 "어라 이곳으로 가면 죽을 것 같은데..."라는 걸 아는 촉이 있다.
이는 게임 안에서 수많은 표식들이 위험 상황이 있음을 도처에서 알려주기 때문이다.
혹시나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가다가 목숨을 잃어버려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목숨을 잃은 귀중한 경험덕에 다음 판엔 신중을 가해 그곳을 지나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이처럼 유저들은 게임을 하면서 스스로 게임 내 존재하는 숨겨진 룰들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바로 옆에 앉아 코치하는 선생님 없이도 오직 몇 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내 역할은 "이봐. 여기로 와, 아니 여기로 오라고!!"라고 외쳐대는 귀찮은 로봇보단, 그저 묵묵히 주인공이 목적지까지 재밌게 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구석구석 숨겨두는 일인 것이다.
게임 스승인 개발자의 말에 따라 대대적인 작업 방식 개편을 시작했다.
먼저 장문의 지시문을 작성한 다음 글을 대체할 수 있는 행동 모션, 기능 등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다음엔 팀원들을 상대로 테스트를 하여 각자가 해석한 걸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처음엔 내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팀원이 나왔지만 거듭된 수정을 거치자 어느 정도 그럴싸하게 되었다. 매우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이전보다 확실히 생동감이 생긴 걸 느꼈다.
지옥의 함정 구간 등장
가상세계 속 유저들은 목적지가 아닌 함정에 잘못 들어서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적을 만나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어도 그들의 본체(?)가 체력이 깎이는 일은 없다.
(정신적인 피로감은 있을 수도..)
하지만 현실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게임의 특성상 목적지를 찾는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우면 실제 그들의 체력 소모도 엄청나게 된다.
제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날씨가 춥거나 더우면 금방 지쳐서 맵이 추상적이거나 불명확할 경우 짜증 유발을 넘어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 진다.
한 번은 GPS를 활용한 AR 아이템을 획득하는(포켓몬고와 유사한) 신을 넣은 적이 있는데 하필 장소가 GPS 좌표로 지정하기 힘든 경주의 광활한 공원 한 복판이었다.
수차례 진행된 베타 테스트를 거쳐 예측 변수를 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판매를 했을 땐 늘 그 스팟이
유저들의 발목을 잡는 지옥의 함정 구간이 되고 말았다.
실제 본인의 체력과 멘탈이 툭툭 깎이는 현실 기반 게임엔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과 제한은 필요하구나라는 것을 우리 모두 실감하고 TMI봇을 조금은 되살리기로 했다.
꼭 정해진 결말만이 답인 건 아니지 않을까
몇 개의 게임 에피소드를 출시했을 땐 내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안했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엔 나름 사람에 따라 결말도 해석도 제각각인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차원적인 내 생각을 아주 멋들어진 포장지에 이쁘게 포장해 주는 고마운 고객이 훨씬 많았다.
그런 리뷰나 피드백을 보면 속으로 "이야. 허접한 스토리를 보고도 저런 놀라운 생각을 하다니.. "
라는 감탄을 종종 하곤 했다.
생각의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든 방향키를 쥔 독재자 마인드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한 뒤부터였던 것 같다.
모든 걸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TMI봇이 된 내겐 다행히도 언제나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를
말해주던 팀원들 공이 매우 크다. 독재자를 막아준 그들에겐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300자 내로 간결하게 줄여줘
팀이 해산한 후 더는 자체 게임을 만들지 않는 요즘, 종종 챗 GPT에게 긴 글 쳐내기를 부탁하곤 한다.
언제나 내 부탁은 한결같다. "제발.. 내 글을 300자 이내로 간결하게 줄여줘~"
더는 게임 시나리오를 쓰진 않지만 어떤 글이라도 써야 할 때면 언제나 글과 메시지가 과하진 않는가를 의심해 보는 습관은 남아있다. 당연히 과하지만 말이다.
현재는 그때와 같은 팀원들이 없지만 대신 똑똑한 GPT가 동참해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무엇보다 수없이 귀찮은 명령어에도 지치지 않고 답변을 해주니 이 정도면 좋은 팀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