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여유란 뭘까.
짜증 가득한 퇴근길 버스 안에서
오후 5시 30분, 사람들을 가득 태운 듯한 빽빽한 버스가 도착했다.
앞서 한 대 보냈기에 이번에는 타야만 한다. 깊은 한숨을 쉰 후 올라타 카드를 찍었다.
집까지 40분 넘게 가야 하는데 서서 가는 건 둘째치고 설 공간 확보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후, 진짜 싫어" 나도 모르게 짜증이 확 올라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은 알지만 이 순간이 너무 싫었다.
멀미가 날 것 같아 핸드폰에서 눈을 뗀 순간, 한 구석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분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종이책을 평온한 표정으로 읽고 계신다. 마치 홀로 해변에서 읽고 있는 사람처럼.
짜증스러움으로 가득 찼던 생각은 ' 평온하게 책 읽는 할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평온할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흘러넘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인 나는 늘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다.
타인의 작은 기침 소리에도 거슬려서 이어폰을 찾고, 누군가가 실수로 팔을 치기라도 하면 공격태새를 갖춘다. 한마디로 곧 전투를 나갈 사람처럼 24시간 예민한 상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숨 막히는 빽빽함 속에서 어떻게 평온한 표정을 짓고 책에 몰입하실 수 있던 걸까?
놀라운 건 할아버지의 귀엔 작은 음악 소리도 없었다. 들리는 건 버스 내 소음뿐.
과거 내게 휴식이 없을 땐 "쉬고 싶다. 진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를 염불 외듯이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소원이 이뤄졌다. 시간이 흐르고 넘친다.
허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불만으로 가득 차 어느 한순간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평온함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보고 싶은 것만큼 보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져놓고 바로 명상 영상을 켰다.
이유 없이 불안할 때 종종 '넷플릭스의 명상시리즈'를 찾곤 했기에 10번은 넘게 본 듯한 영상이다.
하지만 이번엔 불안해서 영상을 켠 것이 아니다. 그저 그의 평온함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유 모를 불안과 걱정은 당신의 내면에서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합니다. "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거다. 늘 빨간불이 들어와 있는 내 내면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과 짜증에 시달리고 있다.
명상을 다 듣고 나자 '내일은 버스에서 서 있는 시간에 여유 있게 책을 읽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쳐 들다
아침부터 오늘 읽을 책을 신중하게 골랐다. 기왕이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책이면 좋을 것 같아 전자책 코너를 열심히 뒤적였다.
오랜만이었다.
서울에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만원 지하철 출근길이 무섭고 낯설어 종이책을 들고 다녔었다.
재밌는 소설책을 읽으면 왕복 2시간도 거뜬했었다. 아니 오히려 짧게 느껴지기도 했었던 것 같다.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다시 만원 버스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지만 짜증 게이지는 조금 내려갔다.
짜증에 휩싸이기 전에 현재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할 수 있으니 좋다.
할아버지의 표정을 기억하며 내일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