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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nie Jun 28. 2021

Les Miserables, 명작의 위엄

웨스트엔드 관극 중 최고의 연출 작품

영국에서 지낼 때 뮤지컬을 8편 넘게 봤지만 레미제라블을 보지 못하였다는 한이 서려서 이번에는 한달 전에 예매를 해서 갔었다. 66파운드에 2층 드레스서클 맨 앞줄이라니 꽤 괜찮은 예매였던 걸로 기억한다. 공연 당일 공연시작 30분 전에 Queen’s theatre 앞에 갔는데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렸다. 공연장을 그저 바라보는 것인데도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니 이건 수십 년간 오리지널 레미제라블만 공연했던 극장이 가진 아우라일 테다.

좌석도 무대 전체와 배우의 얼굴 표정이 다 보이는 자리라 200%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매 장면과 넘버마다 글자 그대로 입을 틀어막으며 봤고 끝나고는 그 경외감에 자연스레 기립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디테일한 현장 리뷰를 풀어본다:


드디어 보는 레 미제라블.  STALL  이 아닌  Dress Circle 석이지만 맨 앞줄이여서 시야가 매우 좋았다.

01. 시선의 전환과 세심한 모티프, 연출력

소름이 끼칠만한 장면 연출이 몇 씬 있었는데 단연컨대 최고의 연출 씬은 자베르의 자살 씬을 뽑고 싶다. 강가 다리 위에서 하늘의 별을 보면서 본인의 신념과 장발장의 선행 등등에 아이러니를 느끼고 강으로 뛰어들고 마는 장면인데 노래를 들으면서 이 모든 내용을 어떻게 구현할지 너무 궁금했다. 다리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다리가 무대 바로 위라서 떨어지기도 애매하고 자칫하다간 장엄한 넘버 뒤에 액팅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내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출가는 발상을 전환해서 무대 뒤 스크린을 강물 화면으로 전환하고 자베르가 물로 떨어지는 걸 관객이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것처럼 표현해버렸다. 이런 전환을 천재라고 하는 걸까.

또 하나는 혁명군이 전멸하고 마리우스만 살아남아서 죽은 동료들을 그리워하고 본인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표현하는 씬이다. 마을 여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나와서 초를 들고 노래를 부르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들어가는데 나는 그 소품이 죽은 혁명군 개개인을 상징하는 모티프였다고 해석한다. 마리우스의 넘버 중에 그들이 다시 나와서 노래를 부르다 동선에 따라서 각자의 초를 들고 들어가는데, 복잡한 동선과 노래 가운데에서도 모든 무브먼트가 딱딱 들어맞아서 너무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우스가 자신의 초를 들고 후 부는데 그 연기가 공중으로 날리는 걸 굉장히 강렬하게 보여준다. 연기 자체가 전사한 혁명군과 다시 사라진 그들의 이상 등을 상징하는 것 같았고, 이런 연출 디테일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었다.


창의적인 연출로 극적으로 나타낸 프랑스 혁명과 그 이면, 고뇌

02. 캐릭터

1. 장발장&자베르:

보면서 계속 인간의 선과악을 구분/처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메인 캐릭터들이다. 특히 사회적 상황과 아무도 자기를 믿지 않는 상황 때문에 죄수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는 초기 장발장과, 비숍이 죄를 지은 자신을 한번 믿어주자 개과천선하고 남을 위한 인생을 살게된 후기 장발장의 비교, 그리고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한다는 신념 하나로 움직이는 자베르와의 비교를 통해 생각해볼 만한 가치들이 정말 많았다. 또한 종교적 면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자베르는 특히 신에게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장면이 많다. 즉, 엘리트 코스를 밟고 신실하게 종교생활을 한 자베르는 죄인을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장발장을 쫓는 것인데, 그래서 마냥 착하게 살고있는 장발장을 방해하는 자베르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신에게 기도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고 장발장도 마찬가지이다. <Who am I> 라는 넘버에서 그는 가만히 있으면 새 삶을 살 수 있는 유혹을 뿌리치고 신이 자신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노래한다. 상반된 삶을 살고 있는 두 캐릭터가 둘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면에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매우 많았다. 자베르의 기도는 규율/선과악의 구분, 장발장의 기도는 양심, 비숍의 기도는 용서를 대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테나르디에 부부:

장발장과 자베르의 이야기로 좀 극이 어두워질 때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화려한 노래/퍼포먼스로 무장한 테나르디에르 부부의 넘버가 등장한다. 항상 이 둘이 나오면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고 눈귀가 즐겁다.(특히 Master of the House! 커튼콜에서 이 배우들이 인사할 때 환호성이 엄청 컸던 건 예상가능한 결과였다) 더불어 이들은 혼란한 시대상을 이용해서 한몫챙기려는 기회주의자들을 매우 잘 상징한다. 나름 시대를 후딱 읽어서 혁명 전후에 겉모습만 바꾸고 어떻게든 돈을 챙기는 모습과 하수도에서 마리우스의 반지를 빼면서 “it’s the world where dog eats dog”라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장면이 약삭빠르고 자기의 이익만 중시하는 그룹을 우스꽝스럽게 잘 캐릭터화한 것 같다.


3. 에포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넘버인 <on my own> 을 부르는 에포닌은 메인 캐릭터 중 유일한 흑인 배우였는데 넘버에서도 특유의 소울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유년시절과 성장 후의 포지션이 코제트와 반전을 이루는 캐릭터인지라 캐스팅디렉터가 그것도 고려했을 수도 있고, 2년전엔 웨스트엔드 무대엔 대부분이 백인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졌던 거 같은데 이번엔 앙상블에도 인종 비율을 좀 맞추려는 노력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러면 테나르디에 딸인 캐릭터인만큼 어린시절 잠깐 나올 때도 좀 맞추고 테나르디에 부부 중 적어도 하나라도 흑인 배우로 하는 게 이야기 개연성 상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에포닌의 넘버랑 연기는 진심 너무 좋았고 그 애절한 느낌도 표현이 너무 잘 되었다.

+그리고 혁명군 꼬마.. 조연 중에 넘버도 많고 연기력도 요구되는 역할인데 뿜어내는 존재감이 대단했다. 저 자리도 경쟁률이 엄청 셀 텐데 저 나이에 저정도로 소화할 수 있단 건 후에 주연 자리는 따놓은 당상일 듯 하다..! 미래가 더 기대되었던 배우.


03. 넘버

진짜 모든 넘버가 주옥같고 오케스트라가 바로바로 연주하는 음악과 배우들의 열창은.. 말이 필요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곧바로 전곡을 다운받아서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장면이 하나하나 다 생각나면서 전율이 온다.. 특히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One day more... One day more>은 모든 캐릭터들이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의 멜로디로 전체가 합쳐지는데, 딱 당대의 대표적인 인간 군상들을 하나하나의 캐릭터로 상징화시킨 것 같았다. 레미제라블 뮤지컬 자체를 표현할만한 단 하나의 넘버를 고르라면 이 넘버가 되지 않을까!

하나를 더 꼽자면, <A heart full of Love>도 개인적으로 코제트의 소프라노 보이스와 마리우스, 그리고 에포닌의 목소리가 너무 잘 어우러져서 내적 환호성을 지르며 감상했던 넘버. 극중 등장하는 모든 넘버가 각자의 캐릭터가 뚜렷하고 메시지가 확연하다. 역시 뮤지컬 명작은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레 미제라블은 국내에서 영화로도 큰 인기를 끌었었고, 사실 영화를 먼저 보고 뮤지컬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넘버들도 훌륭하기도 했고… 그래도 오리지널 캐스트의 공연 실황을 관람하자, 오리지널은 역시 오리지널이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귓가에는 뮤지컬 넘버들을 재생하며 바쁘게 돌아다녔던 그 겨울의 레스터 스퀘어를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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