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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피구는 싫어하지만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로 먹고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

 무서운 속도로 공이 날아온다. 나는 공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친다. 그 때, 들려오는 짜증 섞인

주장의 목소리. “야 피하지 말고 공 잡아!” 하지만 날아오는 공은 너무 빠르다. 나는 콩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주저앉는다. 공이 세차게 내 등짝을 가격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경기장 밖으로 뛰어나간다.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릴 때 나는 체육시간이 싫었다. 특히 싫었던 건 피구. 피구를 잘하려면 공으로 상대를 잘 맞추거나

날아오는 공을 잽싸게 피해야 한다. 둘 다 내게는 없는 능력이었다. 게다가, 공으로 사람을 맞춰서

죽이는 게 게임 룰이라니. 룰이 너무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체육선생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초, 중, 고 내내 틈만 나면 여자아이들에게 피구를 시키셨다. 그렇게 나는 운동과 담 쌓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내 나이 스물다섯. 나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자발적인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계기가

된 건, 지독했던 내 외모 콤플렉스였다. 작은 키, 긴 허리, 짧은 다리, 너무 마른 상체와 빈약한 가슴,

튼실한 허벅지. 콤플렉스 리스트는 끝도 없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로 태어나면 좋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낭비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내가 나로 사는 게 진 빠지는 나날이었다.


 운동은 내가 외모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집에서 처음 유튜브를 보고 운동을

따라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예쁜 엉덩이와 날씬한 허벅지를 만들기 위한 30분 운동 영상이었다. 영상

속 트레이너 언니는 처음보는 기괴한 동작들을 웃음기도 없이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따라 개구리처럼 팔딱거리고 뛰기도 하고, 뒤집어진 바퀴벌레처럼 팔다리를 버둥대기도 하고,

바닥에 누워 엉덩이만 천장으로 번쩍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웃기고 또

애처로워서 웃음이 터졌다. 동작은 코미디 같다고 생각했는데, 30분이 지나고 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땀 흘린 후의 상쾌함과 개운함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몇 주가 지나자 어색했던 동작이 제법 익숙해졌다. 나도 이제 영상 속 트레이너 언니처럼 그 괴상한

동작들을 웃지 않고 진지하게 따라하게 됐다. 목표 근육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체크하면서. 유튜브

운동 영상들을 마스터하고 나자, 더 힘든 운동들을 하고 싶어 졌다. 요가, 필라테스, 크로스핏, 웨이트

트레이닝, 러닝, 수영, 스쿠버다이빙. 나는 도장 깨기 하듯 운동 종목을 늘려갔다.


 그렇게 체육시간을 제일 싫어하던 소녀는 만능스포츠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침 일곱시에

새벽요가, 점심엔 크로스핏, 저녁엔 필라테스를 하는 나를 보며 회사 사람들은 말했다. ‘은지 매니저는

운동하려고 회사 다니는 거 같아요’ 그 말을 현실이 되어서 나는 결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운동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지 2년이 지났는데, 아빠는 늘 같은 말을 하신다. ‘명문대 경영학과 나온 딸이

필라테스 강사 한다고 하면, 아빠 친구들이 다 놀란다.’ 사실 나도 그랬다. 체육시간을 그렇게 싫어하는

내가 운동을 좋아하게 될지는 몰랐다. 아니, 운동을 좋아하게 된 후로도 내가 운동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만큼 운동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치니까. 그래서 운동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도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고 있는 일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요즘, 그 때 고민했던 시간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 시간동안 경력을 쌓았다면 지금 난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가 있을까.


 영화 <머니볼>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 타자가 있다. 이 타자가 친 공은 항상 1루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 날도 타자는 공을 치고 1루로 달려가 엎드린다. 자신이 아웃될까 두려워하면서. 그런데

관객들이 그 타자를 보고 웃기 시작한다. 그가 친 공이 잡힌걸까? 아니 그 공은 홈런이었다! 홈런인

줄도 모르고 1루에 웅크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비웃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 타자처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원래 이걸 잘 못해. 나는 원래 이거에 재능이

없어.’라고 선을 그으면서.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임의로 그어 놓은 선일 뿐이다. 그 선이 의미하는 바는?

없다. 그냥 지우고 넘으면 그만이다. 피구는 여전히 못하지만, 운동을 가르치고 있는 내가 보증합니다!

그러니 모두 선을 넘으면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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