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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인 Feb 14. 2024

청소년들의 자살에 대한 엘머 할아버지의 당부

도덕2 교과서, <삶은 왜 소중한가> 발췌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줘. '의미가 있기 떄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여행이 왜 멋지지? 짐을 꾸리고, 지도를 찾고, 돈이 떨어지고, 황홀한 풍경에 넋을 잃고, 길을 잃고, 추운 밤을 지새우고, 가끔은 울고도 싶어지는데 왜 사람들은 길을 떠날까? 다름 아닌 그 모든 걸 직접 느껴 보기 위해서지. 고생을 각오하고, 위험을 알면서도 떠나는 거야. 떠나고 느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니까. 우리의 삶은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여행이라고, 그 아이들에게 일러 줘. 마음 가득 느낌과 감동을 담으러 떠나온 길이라고. 그러니까 그 길 끝까지 한번 가 보라고. 슬픔이 오면 슬픔을, 기쁨이 오면 기쁨을 기꺼이 느끼면서 그 길을 즐겨 보라고. 타고 가는 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행을 그만둔다면 너무 아깝지 않아? 진짜 멋진 풍경은 버스에서 내려서 시작되니 제발 그 '사춘기' 버스에서 뛰어내리지 말라고 일러 줘. 그리고 우리의 여행은 반드시 돌아갈 날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곽세라, "인생에 대한 예의"-



"살아가는 의미를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 죽고싶지 않으니까요."


내가 브런치에 적어둔 소개이자, 나의 삶의 좌우명이다. 그래, 죽고싶지 않다. 살고 싶다. 그런데 때때로 죽고 싶다. 사는 방법이 죽는 것 밖에 없다고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할 것 같고,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지옥이 있다. 죽어야만 살 수 있다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인간에게 구원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풀어 얘기하자면, 결국에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분법도 죽음이라는 한 점으로 소멸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나 저러나, 부자가 되든, 건강을 잘 관리하든,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든, 어쨌든 죽는다는 것이다. 잘 키운 게임 캐릭터든, 방치된 캐릭터든 종국에는 삭제된다. 이러한 통찰은 허무주의라는 부작용도 낳지만, 어쨌든 살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이 프로그래밍된 인간에게서 두려움을 걷어준다. 단적으로 용기가 없어 망설이는 일들,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일들도, 내일 죽기로 예정된 인간에게는 마치 허용 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전여친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또 할 수 없는 무수한 영혼들이 기어코 연락을 참는 이유는 내일 죽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 죽는다면, 그냥 연락해서 보고싶다 사랑한다 고마웠다 행복했다 미안했다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내일 죽지 못해서 참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내일 죽지 않는다는 게 야속할 정도다.


자살 방지 교훈에 죽음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이유는 단순한 반항심이나 반골기질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결말은 정해져있다. 죽는다. 그러니 쫄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삶을 즐겨라. 관망해라. 죽음에 이를듯한 고통 조차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그래도 너무 괴로우면 차라리 비웃어라. 이토록 중차대한 문제에서 웃으라고? 사느냐 죽느냐 문제인데 웃으라고? 그래 웃어라. 어차피 우주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과 최고의 고통은 지난 사람들이 이미 겪었다. 그런 사람들조차 지금은 죽고 없다. 고요하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너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여겨져도, 실제로 그럴 확률은 0.00000001%도 안된다. 그냥 나르시즘에 빠진 환자다. 그러니 언제나 비웃을 여지는 넉넉히 있다. 너무 무거워지지 마라. 진지해지지 마라. 별 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은 죽고, 진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에도 사람들은 버티며 산다. 어차피 죽으니 그냥 죽어버리자는 논리를 그럴싸하게 내밀어도, 우리 솔직해지자. 살고싶잖아. 죽는 걸 알아도 살고 싶잖아. 그러니 살자. 그리고 이왕이면 잘 살아보자. 기쁨도 기쁨으로, 슬픔도 기쁨으로, 가진 것을 잃어도 가졌다는 불변의 사실로 위로 삼으며 나아가자. 일단 내 나이 33살, 나보다 일찍 요절한 사람들보다 노래방 추가시간 마냥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 되도록이면 오래오래 그 누구보다 훨씬 오래 살고 싶다. 소멸되고 싶지 않다. 영원히 살고 싶다.


의미를 찾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찾지 못해도 좋다. 사실 죽어버려도 좋다. 그러나 살고싶어서 죽는 거라면 그냥 살자. 


막 살지 않으려고 하니까 인생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니, 좀 막 살자.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그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고, 그런 행운도 있고 저런 불운도 있는 법이리라.


사는 일을 겁내서 죽음으로 숨지 말고, 죽는 일을 겁내서 삶으로 파고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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