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결혼비판
임마누엘 칸트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 논했다면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공부하며 그의 엄밀함과 빈틈 없는 논리에 놀란다.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세계에 분명 여러 영향을 끼쳤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탐구한 순수이성비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탐구한 실천이성비판,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탐구한 판단력비판까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이 총체적인 저작이 그러하다.
문득 이런 칸트가 '사랑'이라는 이 불가해한 것에 대해 철학적 저술을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사랑에 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세히 안찾아 봄, 이미 있을지도)
물론 칸트도 이것에 대해 숙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는 여성으로부터 쏟아지는 청혼을 수락할지 말지를 숙고하였는데, 한 적극적인 여성에게 받은 청혼은 무려 7년이나 고민했다고 한다. 칸트는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의 구애가 그의 마음을 심히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7년간 수백가지의 수락이유와 수백가지의 거절이유를 저울질하다 결국 청혼을 수락하고 만다. 그때 이미 상대 여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해 아이가 2명이나 있었을 때였다. (칸트 진짜 미친x이네...)
세계적인 걸작을 써낸 칸트도 망설이게 만든 사랑과 결혼. 평범한 인간에게는 더욱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의 정점을 이루는 것과 결혼이라는 문명의 도덕성의 정점을 이루는 것과의 화해를 이루려니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냥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감수하고 있을까. 추정컨데 첫 번째 이유는 칸트의 말을 빌려 얘기하자면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사랑과 결혼을 그러려니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연히 경향성과 도덕성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람을 얻었고 그것을 곧바로 도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은 어쩜 그리 한 눈 팔지 않는 좋은 남편입니까? 물었더니 저는 그저 제 아내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다고 여겨지고 사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부류이다.
이 둘이 아닌 중간에 끼인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번뇌한다. 사랑이라는 것 조차도 우정이나 성욕과 다른 무언가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일관되게 의욕하기에 매우 어렵다. 즉 나의 경향성을 예측할 수 없다. 오늘은 좋은 저 사람이 내일도 좋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그대로 옳은지, 추구할만한 가치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의 본질인지 외면인지 모를 여러 선천적(외모, 몸의 형태, 성격 등)이고도 후천적(재산, 배경 등)인 조건들도 그렇다. 내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또 그렇지 않을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도무지 판단이 안된다. 그런데 여기에 도덕적 법률적 의무가 부과되는 결혼이라는 제도까지 덧씌워지면 그냥 이건 질식해서 죽으라는 소리가 되버린다.
사랑을 안할 수도 없고, 그냥 할수도 없는
결혼을 안할 수도 없고, 그냥 할수도 없는
이 연옥에서 무수한 중생들이 번민한다.
도무지 단순해지지가 않는다.
절대적인 만족을 내려놓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일단 시작해 자신을 던져 살아도, 생겨나는 생명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무책임으로는 아무런 행복도 건져올리지 못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내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랑과 결혼을 추구하고 어떤 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결코 타협해서는 안되는지. 그 과정에서 나의 희망과 절망이 무엇인지.
그렇게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싶다. 그러나 길을 잃은 지금으로서는 파멸하지는 않아도 패배감만 연거푸 맛 볼 뿐이다.
**갑자기 떠오른 창작에 10분만에 쓴 글. 후에 잘 다듬을 예정. 까먹기 전에 일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