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세계시민적 관점게서 본 보편사의 이념'을 읽으며 떠오른 자유와 운명의 단상을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와 위대한 철학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다며, 진정한 자유의 개념을 세우고자 했던 사람을 스피노자 말고는 알지 못한다. (불교는 논외로 한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납득할 수 있는 명제이다. 우리는 자유가 있다. 그러니 계획도 세우고 우리를 스스로 이끌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 자유가 없다면 계획을 세울 이유도, 스스로 이끌 이유도, 책임질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있는 것이며 존재는 무기력과 동의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의지를 이어받아 다시 한 번 재차 자유를 부정하고자 한다. 이 세계에서 오직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만 자유가 허락되었다는 칸트의 관점이 사실은 인간의 오성적 한계로 인해 인간에게만 자유로 인식될 뿐,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자에게는 그 또한 인간이 동물에 대해 느끼듯 자유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설파하고자 한다.
자유라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독립되고 완벽한 무언가인가 아니면 훼손되고 더럽혀지고 불완전해질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자유가 전자라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제한된 범주에서 불완전하게만 자유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즉 언제나 그 자유가 나라는 정체성에서 분리될 수 없고 육체와 습관과 사회 문화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 점심 메뉴를 선택할 때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그 선택의 근거는 자유롭지 않다. 나의 기호 즉, 입맛과 한국의 음식 문화와 사회 관습에 종속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자유를 나의 주체적 선택으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주체적 선택이 우리에게는 예속이라는 점에서 자유는 반드시 나와 결탁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자유를 행사한다.'라고 얘기될 수는 있으나 뒤따라서 '자유를 행사하는 나는 자유로운가?' 라는 질문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로부터 구성되지 않은 나가 자유를 행사하는 모순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단적으로 전자가 표방하는 순수한 자유가 가능하려면 자유는 변화와 동의어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자유는 무한한 변화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가 인간의 순수 자유를 지지한다면 이 말은 즉슨, '사람은 자유롭지만 변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 자유에게는 모순이다. 변할 만큼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가 순수 자유가 아니라 불완전 자유일 경우에는 이러한 모순이 해결될까? 후자의 관점에서는 분명 인간의 자유를 논리적으로 성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제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인간의 자유가 그토록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것이라면 동물의 자유와 어떤 차이가 있냐는 질문이 뒤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도 자유가 있다. 동물원만 가봐도 같은 종의 다른 성격들과 다른 행동 습관들과 다른 적응력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 간의 이런 차이와 인간 간의 차이에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인가. 아직 나에게는 이를 전복시킬만한 명료한 자유의 개념이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인간이 자유가 없다는 결론을 고수한다. 인간을 폄하하기 위함도 아니고, 스스로를 무기력으로 밀어넣을 심산도 아니다. 그저 그것이 사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는 얘기보다 자유가 있다는 얘기가 더 합리화처럼 들린다. 이로 인해 성취가 모든 무로부터 솟아난 완전한 창조 행위가 되어버리며 자유의 경지가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듯한 도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개념이 패배자를 지옥으로 밀어넣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세계의 필연성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목적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감을 선사한다고 주장한다. 즉, 손가락이 10개이고싶은 자유가 있는데 5개밖에 없어서 이에 대해 예속감과 절망감을 느끼거나 손가락을 10개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며, 내게 주어진 손가락 5개에서 할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결국 제한되고 인과로 엮여있는 것을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그 범주 내에서 자아의 실현을 통해 자연이 인류에게 준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범주에서 우리에게는 변화가 허락되며 자유도 허락되고 성패도 결정되고 기쁨과 슬픔도 결정된다.
도토리에게 장미로 피어날 수 있는 자유 따위는 없다. 도토리에게는 그저 떡갈나무로 자라날 자유만 있을 뿐이다. 도토리는 떡갈나무로 화려하게 개화할 것인가 아니면 땅 속에서 그저 썩어버릴 것인가의 기로에 서있다.
인간은 도토리의 자유 개념과는 조금 다른데 그 부분이 핵심이다. 첫째, 인간은 도토리와 다르게 자신을 스스로 추동하고 인도할 수 있는 듯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으로나 사유로나 일정부분 사실인듯 보인다. 우리의 의지와 마음가짐이 우리의 퍼포먼스를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며 그 범주 내에서 자유의 원인이 우리 내에 있음도 분명히 확인되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스스로 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따위가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있다. 둘째, 인간은 자신이 도토리인지 콩인지 팥인지 자명하게 알 수 없다. 물론 인간의 자질에 대한 단서는 그의 삶 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러한 차이는 얼마든지 커버 가능한듯이 보인다. 즉, 인간과 인간의 차이가 아득해서 인간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언정, 그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차이의 범주를 예단하고 폄하하고 간과할 수는 없다. 즉 인간의 자신과 세계에 대한 무지가 자신에 대한 가능성과 자유와 노력의 여지를 열어준다.
그러니 자유가 있건 없건 우리의 태도가 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가진 자유를 활용해 최대한 노력해 우리 안의 꽃을 피우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임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