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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Feb 26. 2019

도스토 선생의 미소


1. 밤하늘의 두터운 어둠 속 점 하나를 찍어 들여다보자. 무섭고 숨막히는 적막으로 믿었던 그곳에는 사실 공허가 아니라 수천 개의 은하가 빛을 내며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로 도달할 몇 천 광년의 시간이 그 사이에 놓여져 있을 뿐, 기실 우리는 꺼지지않는 영원한 빛무덤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니까. 하나님은 너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을거야. 생각해보자.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개미집의 입구를 막으면 개미떼들은 방황하겠지. 너가 공평무사한 신이라면 개미를 벌하겠니, 어린아이를 벌하겠니? (J의 눈가가 생기를 잃고 애꿎은 눈물이 번진다.) 내가 놀라게 했구나... 미안해... 난 그저 너의 불행과 고통이 너를 구원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어... (대신 내가 너의 구원이 되어줄 수도 없겠지...) 그저 걱정되서 하는 말이야. 스스로 죄를 지을 필요는 없단다. 너도 알잖아. 너가 그렇게 슬픈 눈으로 보면 나는... 나는 너무 초라해진단다... 아무것도 아니게 된단다... (J가 내 손을 잡는다. 왠지 슬픔이 조금 가신 듯, J의 손에는 온기가. 아... .... 나는 그 사실에 안도가 되기보다는 한없이 죽고 싶어진다. 내 초라함이 너에게는 위로가 되는구나...) 가서 맛있는거 먹자. 술도 먹고 너가 좋아하는 건 다 하자.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술도... 그리고... 그리고... (나는 몇 분간을 실어증에 걸린다. 이미 손바닥은 J손의 열기 때문에 바싹 말라버렸다.)

 

3. 열 개의 죄가 열 개의 고통으로 연결되는 법은 없었다. 말은 말, 단어는 단어였다. 대양의 드넓음만큼 세상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도 가득했다. 빛에 빚을 떼먹힐까 어둠이 쫓아다닌다는 이야기만큼 우습게, 어둠을 쫓는 서푼짜리 빛도 있는 모양이었다. 또 내게 그럴듯한 가면을 쓰는 법을 물어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재밌는 것은 A는 천역덕스럽게도 맨얼굴이 수놓아있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가면과 맨살의 분간이 안되는 연기자를 그 어떤 평론가가 감히 평할 수 있을까. 이미 그가 곧 그인 것을. 나는 진땀을 빼면서 A의 용기를 칭찬하고 어둠 같은건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했다. 이미 어둠속에 있는 사람이 어설픈 등을 켜봐야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만 확인할 것이므로. 장님은 장님처럼 살면서 스스로에게 침잠해가는 것이 도리어 A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말에 A는 만족한 듯 뿌듯한 듯 웃음 지었다. 그 맑고 잔인한 미소의 밑바닥에도 정말로 은하수 같은 것이 걸려있을는지. 세상 도리는 참 알 수가 없구나. 나는 도무지 A와 밤을 지샐 용기가 나지 않았다.

 

4. 피지도 않던 담배를 샀다. 서툰 솜씨로 불을 붙인다. 정말로 반으로 가르면 빛과 그늘로만 나뉘는 인간이 있을까? 정말일까? 나는 잔여물이 없는 인간은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악취는 풍긴다. 악취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의 악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이다. 나의 삶을 반추해본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찾았던걸까. 나를 통해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후우... 후, 후우... 죄는 죄. 고통은 고통. 벌은 벌. 과연. 벌은 벌인가. 언어의 서까래들이 우루루 도미노처럼 무너지자 마음이 슬퍼진다. 떠나간 것들 전부 도리를 알고 물러선 것이로구나. 버린 것이 아니고 순리대로 나아갔을 뿐이구나. 모든 헛된 것들을 헤치고 헤쳐 이제야 알겠다. 신이시여. 제게 단 한가지의 죄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에 대해 무저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잔밑 무수한 은하의 소식에 모골이 송연해졌던 것입니다.

 

5. 치직치직. 화마가 담배를 다 태우고 손가락까지 손을 뻗친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한밤중 배고픈 개들의 침이 고인다. 왈! 한 녀석이 너무하다는듯 빼꼼 소리를 내본다. 고것이 귀여워 선생이 웃는다.

 

6.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인간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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