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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Apr 17. 2024

잘 가, 나뭇잎 생각들

#일기

1.


비.


도록도록 흘러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몽환의 아침, 통창문이 있는 접 대기장이었다. 대기장이라니, 내 차례가 되면 비행기를 태워 세월 너머로 훌쩍 보내주려나. 이상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전날 새벽 3시까지 평소에는 보지도 않는 드라마를 보다가 준비도 서두름도 없이 시간에 딱 맞춰 왔다. 왜 하필 제가 아무 생각 없는 날에 면접 일정을 잡으셨죠? 이런 날은 정말 드문데 말예요. 생각이 없어서 말이 앞장서는 대로 멀뚱멀뚱 따라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별안간 무언가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나른함에 눈을 감아버렸다. 한 것도 없는데는데는데…… 왜 피곤하지하지하지….


피로.


받침도 없이 이리 무거운 글자를 보았나. 너무도 무거워 무릎이 .  종이 펼치면 좌상부터 우하까지,


.


가없다.  무엇처럼.


다시 이불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완전히 밝아져 있었고, 뭔가를 쓰고 싶었던 눅눅한 내 마음도 알아서 말쑥 개 버렸다. 또 다시 태어난 건가. 이번 삶에서는 과연.


비가 그침.



2.


어떤 곳은 면접관들이 극진히 환대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싫다고 악지를 부려대고, 어떤 곳은 나도 그쪽도 대충대충 만나서 대충대충 이야기한 것 같은데 어느새 서로 사인한 계약서를 한쪽씩 나눠 들고 있다. 참 모를 일이지. 이 모를 일들을 알 일들로 딱 바꿔 놓고서 살고 싶은데, 그거야말로 젤로 모를 일이란 말이지.



3.


일요일마다 책이 있는 작은 공간을 관리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김밥을 사 들고 일하러 가던 첫날(산속에 있어서 점심을 싸가야 한다), 같은 영혼은 제멋대로 처량에서 청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날따라 오롯이 마음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기꺼이 가자. 공간의 문을 일찍 열고 환기를 했다. 창밖으로 때아닌 초여름의 신록이 자울거리고 동시에 응달에서는 여남은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여기,  유한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 나는 잠시 절하는 마음이 되어 눈을 감았고, 일점으로 모여드는 거인 생각들을 순간적으로 번쩍 들어 비워냈다. 잠시 후면 사라질 가느다란 청량까지도. 9시간 동안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간간이 정리를 하고 책도 읽었다. 화장실을 함부로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몇 번 인상을 찌푸렸고 산속이라 벌레가 많아 뜨악했지만, 사람이 바뀌었냐며 말을 거는 동네 할아버지도 있었고 개미를 잡았다며 보여주는 귀여운 아이도 있었다. (그거 개미 아닌데!) 다저녁에 해가 지자 빛은 사라지고 마지막 손님도 저녁을 먹으러 가고 산고랑홀로 캄캄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남은 것은 오직 피로뿐이었다.



4.


이 짧은 건 예사로운 일이라지만 우리가 짧음을 이해하기엔 아직 짧다라는 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짧다라는 그 짧은 탄식. 봄이면 형용사가 아니라 감탄사로 쓰이는 아, 짧다!


무엇을 망설이세요 잠깐 중에 제일가는 잠깐이라고요 자 낮에 주워온 오늘의 꽃잎들을 마셔 보아요 어때요 곱단하게 취해봐요 그러면 조금 다정해집니다 그러면 조금 야만해집니다 그러다


다 잊어버리면 어때요?


희망도


절망도



5.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내 경력에 맞는 곳에는 두 군데 넣었고, 두 군데 모두 최종까지 면접을 보았다. 내가 쌓아온 경력과 나이가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영상 업계의 인력 시장에서 제일 잘 팔리는 나이는 대체로 적당히 경력을 쌓은 20대 후반인 듯하다. 오버 스펙인 나는, 일을 막 시키기에도 적은 월급을 주기에도 알맞지 않다.


그러나 소녀 아직도 단칸방을 기웃거리고 있사옵고아무것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무엇이든 하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색은 즉 공이요 공은 즉 색이로구나.


어디든 다시 한번 계약하게 된다면, 그것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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