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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May 19. 2024

큰 절망에서 작은 절망으로

큰 절망에서 작은 절망으로 가자고 마음먹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큰 절망과 작은 절망 사이는 아주 멀다는 뜻이다. 걸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일요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 버스 차창 너머로 하얀 밥풀때기 같던 이팝꽃들이 사라진 자리에 초록이 수북했다. 이 길은 작은 절망으로 가는 길인가. 꽃은 사라져도 잎은 남는가. 보이는 세계가 그 자체로 그때그때의 시라고, 전언이라고, 거기가 입구라고 믿고 싶었다. 믿어졌다. 믿어진다니… 그것은 구원 아닐까, 라고


믿자― 믿어보면,


구원받은 하루가 시작된다. 산다는 게 이리도 겨운 일이었던가. 바람이 불자 살음이라는 감각에 눈이 시었다. 사라진 이팝꽃들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나 봐. 부서진  부스러기가. 버스 창문을 닫지 않았다. 두 번의 환승을 거쳐,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산 언덕께 자리한 책방에 도착했다. 같은 서울 아래 멀고 먼 길. 40분 일찍 문을 열었다. 이곳에 오자 새 회사에서의 어려운 인간관계, 고질적인 내 쭈뼛거림,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하는 어색한 존재감이 차츰 옅어지면서 그것이 내 일부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또다시 월화수목금의 생활 세계 속에서 버둥대고 있다. 옮길 때마다 그랬지 않았던가. 그래도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믿어보면 큰 슬픔도 작은 슬픔으로 정리되리라.


한동안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취업이나 결혼, 내 집 마련 같은 문제가 아니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화려한 경력과도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내 것.' 나는 무언가에 익숙해졌다고 생각될 때면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살 수 있는가? 어딘가에 소속해 있지 않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이 삶에서 저 삶으로 거점을 옮길 수 있는가? 나로부터 떠나서 나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전에 묻는다. 삶에서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그것이 닫힌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 갈 텐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미래에서 온 언어다. 곧 잊어버릴 문장이라도 나는 항시 마음 다해 읽었으니. 사는 것 또한 그랬을진대.


그것은 단연코 고단한 생활을 더 고단하게 하는 물음들이었다. 연연세세 내 삶의 숙제란 겨우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 쫓겨났을 때 어디서 어떻게 삶을 이어갈 것인가. 거처도, 일터도, 영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조기에 만료되었다. 길에 오른 지 몇 걸음 못 가, 길은 자꾸만 나를 떨어뜨렸다. 내던져졌다. 내던져졌을 때 덜 아프려면 마음의 무게를 가벼이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다친다. 그걸 잘 못했다. 모두로부터, 나로부터, 끝내 죽고 싶음이나 죽이고 싶음으로부터도 떠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고 싶음, 죽이고 싶음, 그런 건 너무 무거운 것이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결국 그 말을 사랑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겪어온 세상에는 언제나 절망이 배음으로 깔려 있었다. 희망이 있기에 절망도 있는 거라지만 내가 보기에 그 둘은 한 세트가 아니었다. 그 둘은 계문강목과속종 어디에도 함께 속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큰 절망에서 작은 절망으로 향하는 것이 내가 간신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정도正道였다. 큰 손해에서 작은 손해로, 큰 혐오에서 작은 혐오로, 큰 슬픔에서 작은 슬픔으로. 그래도 그건 손해이고 혐오이며 슬픔이었지, 희망은 아니었다. 구원은 절망이었다. 직전의 것보다 더 작은 것이기만 하다. 믿어야 한다. 한순간 벼락처럼 뒤돌아서서 직전까지의 그것을,


믿어지지 않더라도.


……이러한 극기는 나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가. 매달리는 일이다. 붙잡는 일이다. 그저 그렇구나 하는 일이 못 된다. 아주나 간절한 일이다. 그래서 내려놓음이라는 고행이 매 순간 부수적으로 동반된다. 다음날이 되면 전날까지 썼던 글은 군데군데 덩어리 진 채 미지근하게 식은 절망이 되고, 내 앞에는 완전히 다른 길이 놓여 있다. 작은 절망으로 가는 길일까. 나는 앞선 내 글을 등지고 서서 절망의 연속성을 끊어낸다. 끊어냄으로써 이어 쓴다. 뒤돌아보면 죽는다. 뒤돌아보면 끝내 절망을 사랑하고 말 것이다. 회사에 다니지 않기 위해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의 노래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매일  내 앞에 놓인 촛불을 하나하나 끈다. 눈앞에 직면한 촛불을 끄는 것은 내 삶의 숙제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할까?


오늘 책방에 책을 보러 온 사람은 절반 정도였다. 산을 오르기 전 목이 마르다며 물 한 컵만 달라던 남자아이들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더 어린 아이들은 책을 읽는 것보다 책 순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사실은 나도 책 순서를 정리하는 것보다 내 글을 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긋 웃으며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보던 할머니에게 문을 닫아주었다. 문턱에서 서성이기만 하다가 간 손님들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건넬 걸, 후회도 조금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지나갔다. 저녁에는 또 한 손님이 서성거렸고, 그 순간 나는 웃으며 들어오라고 말을 건넸다. 순간이라는 새를 붙잡은 것이! 바로 글을 썼던 그 손로. 쓴다는 건 큰 후회에서 작은 후회로 가는 길일까. 나는 쓴다 라는 말을 사랑하게 된 걸까. 그렇다면 쓴다, 쓴다,   받 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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