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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un 25. 2024

"열심히 사니까 예뻐요"

#일상

유월에는 내내 바람에 흔들리는 수국을 바라보고 있다. 잘게 부서진 꽃 그림자가 제 널따란 잎 위로 아삭아삭하게 내려앉는다. 흩어져도 천국. 망가져도 꽃별천지. 지금 여기 이 나라, 수국. 나는 태양이 사라질 때까지 작은 화단을 수호하고 있었다. 두 번 또는 세 번? 아마도 그 뒤엔 영원히 볼 수 없겠지.




주말 일터의 입구에는 조그만 수국 화단이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윤이 나는 장면들을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아둔다. 그나마 자연의 입구라도 서성거릴 수 있는 시간도 이때뿐이다. 책방이 비탈진 산기슭에 있으며 손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후에 평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여기 사람이 바뀌었어요?"

"아니요, 저는 주말에만 일해요."

"주말에는 학생이 하는구나. 그럼, 젊을 때는 열심히 살아야 돼."

"학생은 아닌데……."


할머니는 내 나이칠십 다섯 살이나 먹었다면서, 젊은 사람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큰돈이 아니라 별 거 아닌 돈, 단 돈 몇 만 원이라도 따로 통장을 만들어 놔요. <절대로 손 안 대는 통장> 말이야. 그게 나중에 큰 도움이 돼요.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나는 요즘 애들이 스타벅스 커피 손에 들고 다니는 거 보면 좀 그래. 먹는 것도 그렇고, 입는 것도 그렇고. 젊을 때는 아무거나 입어도 다 예뻐요."

"네, 꼭 만들어 볼게요. 감사합니다."

"아이구, 착하네."


젊은 학생이 아닌 나는, 그렇게 착하지 않은 나는, 해진 면티를 성의 없게 걸쳐 입고 나온 나는, 그저 웃었다. 할머니는 이 책방이 지어질 때 심어진 나무들과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피어났다는 기특한 꽃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자태를 음미하고 향기를 훔쳐 마신 꽃들의 멀지 않은 과거에 대해.


"열심히 사니까 예뻐요."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다가, 괜히 눈물을 훔쳤다. 나는 피폐와 절망 속에서 절규하던 자요, 술병과 알약 사이를 비틀거리던 박약한 자! 열심히 사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저 죽어요. 말없이 책장을 정리하다가 다시, 수국을 바라보았다. 올여름 작약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정원, 수국. 그러나 나는 수국에 대해서 무엇을 알았던가. 사람들이 나를 일견하고 나를 사랑한다 말하듯, 나 또한 꽃을 일별고 꽃을 사랑한다 말했을 뿐.




오후에 손님이 없어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내가 스미는 무렵에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거리며 책방을 들여다본다. 들어오렴. 여긴 반려동물 출입금지지만, 넌 반려동물이 아니잖아. 아무도 없단다. 몰래 같이 놀자.




다시, 일요일. 길 맞은편에서 할머니가 팔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책방 바로 앞집에 살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벽돌 담장에 사는 장미와 능소화의 빛을 따다가 카메라에 수북이 옮겨 담곤 했던 바로 그 집. 맞아요, 접니다. 당신네 빛을 염치도 없이 주워 모은 파렴치한이요. 나는 겸연쩍게 서서 나의 태평한 과거를 고백하였다.


"우리 집 옥상 구경할래?"


나는 얼떨결에 할머니의 옥상 정원으로 초대받았다. 할아버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더워서 난닝구를 입고 있다"고 선제적으로 고백하여름 참외처럼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커피 좀 내 와요!"


위염에 식도염에 피부염까지 겹쳐 카페인을 중단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젊은 손님이 왔다며 즐거워하는 노부부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옥상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한 원이 펼쳐졌다. 청상추와 꽃상추, 방울토마토, 호박꽃, 올망졸망한 꽃과 풀과 화분들…… 소박하고 누추했지만, 햇살이 환하게 내려앉은 그곳은 황금빛 지상 낙원이었다. 잘 마른 주름천처럼 반짝이는 초록 상추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너무 예뻐요……."



할머니는 올라오자마자 내게 주겠다며 상추를 땄으면서, 할아버지에게도 나에게 줄 상추를 따 오라고 시켰다. 할아버지는 그 청상추는 질기고 맛이 없다며 오히려 자랑하듯 꽃상추를 한 아름 따서 큼지막한 종이가방에 넣어주셨다.


"할머니, 할아버지, 너무 좋은 곳에 사시네요."

"학생은 어디 살아?"

"OO에 살아요."

"아이구, 그렇게나 멀리서 왔어? 이 동네 근처에서 왔거니 했더만."

"네, 좀 멀어요. 괜찮아요. 일찍 나오면 돼요."


두 분은 잠시, 내가 타고 오는 지하철에 대해 5호선이니 6호선이니 악의 없이 티격태격하셨다.


"그럼 평일에도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러 오는 거야?"

"네, 돈 벌어서 집세 내야 되거든요.(웃음)"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책방이 있는 풍경이 한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보증금과 이사비가 모자라 낙담과 체념 진력이 난 자에게도 싱싱한 초록 기쁨이 허락될 지니. 지상 일터에서 쉴 수 없는 고단한 벗들이여, 부디 울지 말자. 환한 햇살 아래, 거기서 뚜벅뚜벅 살아가자.




월화수목금. 읽지 않기에 대해 읽고, 쓰지 않기에 대해 썼다. 그리고 모두 지웠다. 생활은 지긋지긋하게 분망하건만 속이 텅 빈듯한 느낌이 드는 건 역시, 무언가 다 지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쓰고자 한 글이 아니었다. 그건 다음 순간이면 폐기 경박한 외롬이자 출구 없는 생활난일 뿐이었다. 다음 집 구하기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할머니가 주신 상추에다 옥수수알을 넣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쉬는 날 없이 어디론가 출근한다. 어디든 일찍 출근해서 잠깐이라도 책을 펼치고 벼랑에 내리는 첫물을 맞는다. 언제라도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 내가 너무 게으른 것 같다. 내 글쓰기도 실망스럽다. 언제는 쓰고 나서 실망 안 한 적 있었냐마는. 그만… 그만 망치고 싶다. 다 망치는 글을 그만 쓰고 싶다.




더 습해지고 더 더워졌다. 장마가 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소식으로부터 떠나갔다. 나는 그 소식이 좋아서 홀로 남았다. 구름 그늘 속을 빼꼼거린다. 아무도 없어요? 몰래 같이 놀아요.




다시, 일요일. 산만한 메모들을 엮어보려 했지만 내 부실한 몸 하나 쉬어갈 작은 집 하나 구하기 어렵듯, 글쓰기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루가 아삼삼…… 지나간다.


오후 네 시쯤, 적막한 책방에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간식 먹고 해."


(결국 고쳐 쓰려다 말고 그냥 올려두는 글...)

(사진 추가) 또 나타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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