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선배 한 분이 튀르키예로 긴 발령을 떠나시게 되어, 퇴근 후 대학 선배들을 몇 명 만났다. 선배들은 언제나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가정의 형태도,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수준도 이제는 제각각 달라졌지만,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스무 살 때에 멈추어 있다. 마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시간관념이 사라지는 것처럼. 책 읽거나 글 쓰는 시간을 대신해도 아깝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읽을 때나 쓸 때만큼이나 자유로운 순간이 가끔 이렇게, 있다.
선배, 그럼 이제 튀르키예에 놀러 가면 케밥 사주시는 거예요? 이놈아, 케밥만 사주겠냐?근데 저 거기까지 갈 비행기값이 없는데요? 프하핫!
짠.
해외여행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어쩌다 이렇게 대답했다. "에이, 저는 편모슬하에서 자랐잖아요. 출가한 지가 언젠데요." 그러고 나서야 나는 선배들에게 이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내가 그저 특출나게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거의 20년 만에 세라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네."
굳이 먼저 꺼내지 않아도 되는 개인 사정을, 부러 드러내 말한 적은 당연히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현재진행 중'인 관계 속에서 내 이야기를 지독하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스무 살 때라고 달랐겠는가. 그때야말로 자폐아였을 것이다. 그런데 막이 내리고 나서야 시작되는 이야기도 있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끝까지 앉아 있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쿠키 영상 같이 잉여로운 이야기. 그들은 무심코 상영된 추가 영상을 보게 된것이다. 3년 전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으로 어머니를 잃은, 75년생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너무 혼자서만 끙끙 앓지 마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혼자서만 고민하지 말고 얘기도 하고 그래. 살다 보면 사람은 항상 외로움이라는 게 있잖아. 혼자서 너무 벼랑 끝에 살고 그러지 마. 멀쩡한 직장 잘 다니는 선배들도 있는데, 좀 써먹으란 말이야. '선배 밥 사주세요' 하고 불러.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네 곁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너한테 밥 한 끼 못 사주겠어?"
한 선배는 내가 그토록 많은 이직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해 온 것도,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느리게나마 빚을 갚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래도 네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학자금이 '0'이 될 머지않은 그날, 연락이라도 꼭 하라고 했다.
이렇게 잘 눈물 흘리는 사람이 강한 건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짠.
선배의 출국을 위하여, 나의 '0'을 위하여, 그 이후의 시간을 위하여, 우리는 미리 축하했다. 몇 년 뒤에 이렇게 앉아서 내가 "요즘은 좀 살만 해요" 하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누가 또 그랬다. 누구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에 기대앉아 0을 상상했다. 우리 모두 0을 넘어서, 튀르키예의 시간을 건너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그때도 나는 가망 없는 글을 쓰고 있을까?
2024.12.17. 화. D-497
전날 밤 잠든 건, 그날 하루의 불안이었단 걸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전히 마음의 안과 밖을 일치시키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심리학 서적과 경전을 읽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따뜻한 착각 속에서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정 2개를 취소하고 별 것도 없는 일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500개의 포춘 쿠키를 다 까먹고 나서도 배가 고프면 어떡하지. 아니 분명, 다시 '배고픔'으로 충만한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 내가 스스로의 자폐증을 극복하고 "선배, 케밥 사 주세요" 하고 연락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 수많은 질문들을 대신하여 그저 일기를 쓴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이 말속에는 언제나 절망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 '절망'의 자리를 조기 예매해 둔 내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정은 급했고 절망은언제나 빠르게매진됐으니까.
그래도 절망의 기차에서 내렸을 때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가 안전하게 돌아온 모습을 보고 싶다면. 그때 내가 나의 절망으로부터 하차할 수 있다면.
그건 희망이고 싶었다.감자 같이 자상한 선배의 얼굴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건, 절망이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