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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나무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다

D-248

by 세라

오늘 집에 돌아오면서 봤던 풍경.


동네 술집 앞, 취객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남자가 웃음에 취한 채 나무 기둥에 담배꽁초를 문지르고 있었다. 담배의 불꽃이 폭죽 가루처럼 튀어올랐다. 나무의 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갈 때까지 그는, 마지막 불씨를 집요하게 짓이겼다. 순간, 온몸이 소름이 잠겼다. 취한 몸짓과 거친 웃음이 기묘하게 사악해 보였다.


분노보다는 눈물이 났다.


저 나무는 얼마나 아플까.


분노를 끌어올릴 힘이 없었다. 나무를 향한 미안함만으로 감정을 다 써버렸다.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한 건장한 남성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몸통이,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 기둥보다 두껍지 않았다.(이것은 내가 나무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는 가장 단순한 포인트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나무는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우리가 강하다고 착각하는 이 육신, 이 정신보다, 나무는 얼마나 강건한 존재인지.


인간 키의 몇 배에 달하는 높이로 자라난 나무를 보라. 우리는 나무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인간이 지은 건물보다 더 높게 자라는 나무도 흔하다. 그들은 몇 층의 높이건, 엘리베이터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물과 양분을 끌어올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부디, 한 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한 번만 단순하게 나무의 키를 인간과 비교해 보시길 바란다. 나는 언젠가 출근길 버스 창밖으로 가로수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그 비밀을 깨달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나무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주변의 동료들과 이 벅찬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지만, 보고와 결재, 아첨과 복종으로 이루어진 인간 세계는 이 사실의 진가를 알아볼 줄 몰랐다.


나무는 얼마나 힘센 존재인가.


나무여.




나는 특별히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나무를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다. 내가 환경운동가였다면 담뱃불로 나무의 몸을 지지고 있던 자와 맞서 싸웠겠지만, 나는 그저 뒤돌아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는,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나무는 빠르게 회복할 것이다. 나무는 인간의 잔인성조차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라는 태생 때문에 결코 나무의 관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모자라는 것에 균형을 맞출 줄 안다. 어떠한 나무도 최적의 환경을 만나면 세상을 향해 멋지게 펼쳐 보일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의 수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무는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것, 자신의 가장 아픈 곳에 묵묵히 집중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무의 이름이 궁금하지 않다. 꽃잎의 개수, 잎의 구조, 그런 지식도 상관없다.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 - 사람들이 단 한번이라도, 나무를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숲해설가 자격증을 땄지만, 나무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은 대부분 휘발되어 버렸다. 나는 당신에게 나무의 이름을 알려줄 수 없다. 다만 내 마음만 알려줄 수 있다. 원래라면 혼자 흘려보냈을 덧없는 중얼거림만, 용기내어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처 없는 나무가 있었던가.


아마도 나는 언제까지나, 고작 내 마음만을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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