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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Feb 23. 2024

불편했다

삐죽 고개를 내미는 것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은 몇 번의 봄비에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그 속에 숨겨두었던 것들을 꺼내 자랑하였다. 양지바른 담장 아래 올망졸망 늘어놓고는 지나는 사람들을 붙들어 세웠다.

"여기 좀 보셔요?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요."

엉거주춤 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봄볕에 반짝이는 것들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여리고 옅은 것들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바람 한 줌에도 허리가 꺾이고 조약돌 하나에도 잔뜩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봄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모든 게 들썩였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이 엉덩이를 씰룩거렸고 곁에 있던 버들개지가 긴 기지개를 켰다. 깜빡 졸던 버들강아지가 가지 끝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칼바람이 불고 부는 바람마저 잔뜩 고드름을 매달고 멀어져 갈 때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나뭇가지가 맥없이 부러졌다. 잔뜩 이고 진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겨우내 골짜기에는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점잖게 흐르던 강물이 얼었다. 석양이 지면 물비늘이 황금색으로 반짝였었다.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로 몰려와 수면 가까이에서 군무를 추는 것만 같았다. 가을이 깊었을 때 기러기 무리가 하늘을 가득 메우더니만 그 밤에 여기저기서 야반도주하는 무리들로 산길이 북적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떠나고 산과 들이 침묵에 빠져들었고 넘실거리던 강물도 얼어붙었다. 강요된 침묵이었다. 서슬 퍼런 겨울의 칼끝에 모두가 침묵했고 잔뜩 몸을 사렸다. 숨죽인 밤이 깊던 어느 날 강물은 재갈처럼 물린 얼음장을 밀어내며 신음을 토하기도 했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길게 깨지고 겨우 하나 남은 숨구멍으로 긴 한숨을 토했다. 겨울은 모질고 거칠었다. 살아있는 것 하나 남기지 않을 것처럼 설쳐댔다.

달싹달싹 다물었던 입술을 깨웠을 때 죽은 듯 엎드렸던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방긋 웃는다. 봄날이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물은 점잖게 흘렀고 부러진 소나무 가지에도 새 움이 텄다. 부활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이 다져진 흙을 밀어 올렸고 짓누르는 돌멩이를 밀쳐냈다. 봄날은 그래서 놀라웠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것들이 앞다퉈 으스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만 나는 돌아앉았다. 잘난 것들이 꼴 보기 싫었다.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불편했다. 거추장스러웠고 얄미웠다. 마주하고 있으면 초라한 나만 남는 거 같아 불편했다. 봄날이 온다는데 낙엽 떼로 몰려다니는 가을에 나는 서있다. 이내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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