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지않아 5월의 장미가 필 터였다. 햇살은 점점 열기를 더해 여름을 부를 터였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난 봄은 그렇게 작별을 고할 터였다.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왔듯 떠나는 뒷모습도 그럴 터였다. 하여서 서운하다 토로할 이유는 없었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아, 이런 게 계절이구나!"
자각했을 때부터 손꼽는다고 해도 쉰 번은 족히 넘을 세월이 쌓였다. 이제는 비 맞은 뭣처럼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중얼중얼 혼잣말을 읊조리게 된다. 단지 그게 서운하다면 서운했다. 이런.... 서운하다 토로할 일이었구나! 부지불식간에 떠나는 게 서운할 건 없지만, 다시 또 찾아오려나? 찾아오는 그 계절을 다시 마중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과 불안함이 서운한 거였다. 날마다 조금씩 기온이 오르고 초록의 이파리들이 몸집을 키우는 게 서운했다. 그럴 때마다 봄날은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언제부터인가 괴나리봇짐 들쳐 매고 미투리도 서넛 주섬주섬 챙기고야 만다. 때가 가까워졌음을 녀석도 눈치챈 모양이다.
사람이 되었든 꽃잎이 되었든 떠나는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하고 안타깝다. 떠나는 걸음마다 또르르 눈물 한 방울씩 떨굴지도 모를 일이다. 지켜보는 마음은 또 말해 뭣할까. 잘 가라며 치켜든 손 차마 내리지도 못하고 멀어지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배웅할 수밖에는 없다. 이별은 아프고 저리다. 몇 날 며칠이고 끙끙 앓아야만 겨우 물에 만 밥 한 숟가락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가슴에 푸른 멍울 하나 훈장처럼 매달고 사는 게 이별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선인들은 함부로 인연을 만들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였을 테지만 듣는 사람은 늘 귓등으로 흘리게 되는 게 또한 충고이기도 하다. 가슴에 깊은 흉터 하나 만들고서야 그제야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탄식하고야 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온몸으로 겪어내는 게 살아가는 일이라서 그렇다. 옆에서 뭐라 뭐라 기껏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듣는 귀는 이미 천 리 밖에 있어서 그렇다. 뚝뚝 철쭉이 꽃잎을 떨궜다. 장미는 젖가슴처럼 꽃봉오리를 키웠다. 계절은 끝자락으로 치닫고 새로운 계절을 불렀다. 자리 하나를 신줏단지처럼 지키고 앉은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훅 끼쳐오는 꽃향기가 못내 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