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람쥐는 정신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물드는 갈잎을 보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숲을 돌아쳐야만 했다. 머지않아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 들이닥칠 거여서 한눈을 팔거나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뛴다고 해도 시간은 부족했고 가을볕은 짧기만 했다.
두 볼이 터져라 도토리를 물고도 가랑잎 사이에 뒹구는 도토리를 찾아 동분서주 골짜기를 헤맸다. 가을은 짧았고 겨울은 길었다. 길 뿐만 아니라 사납고 매서웠다. 그만큼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겨울을 무사히 건넌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고 애처로울 뿐이다. 그러니 발바닥에 땀이 나고 두 볼이 터져라 하고 겨울을 준비해야만 했다. 목숨을 건 가을걷이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도토리며 알밤이며 알토란으로 여문 가을이 숲을 뒹군다는 거였다. 부지런히 뛰어다니면 그만큼 따뜻하고 배부른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마른 이끼를 물어 나르고 억세지 않은 풀잎을 모아 굴 속 둥지를 채웠다. 바스락바스락 다람쥐의 가을은 그렇게 바삐 저물었다.
사람의 계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유년의 파릇한 잎새가 여름날의 폭염에 초록을 더하는 게 자연의 순리다. 순리를 거슬러 성장하는 나무가 없듯 사람의 인생도 물 흐르듯 때마다 매듭 하나씩 엮어내며 여름을 지나 가을 어귀를 서성이게 된다. 젊음의 열정으로 논 밭을 가꾸고 땀 흘려 가을날의 풍성한 수확을 꿈꾸게 된다.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이글대는 햇살에 초목이 시름을 할 때도 있겠지만, 그 모든 건 삶의 성장통이다.
누구나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책 하나에 낄낄거리도 좋고, 노랗게 익은 귤 하나에 군침을 흘려도 나쁠 거 없는 계절을 원한다. 거기에 더해 지나온 발자취 하나씩 돌아보며 미소 짓는 여유를 원하기도 한다. 바쁠 것도 없고 꿈틀거리는 열정도 사그라든 뒤라면 더욱 그렇다. 초원에 길게 배를 깔고 오물오물 반추하는 소와도 같은 계절이 겨울이고 노년의 시간이다. 삶의 마디마디를 통과하는 과정은 그래서 이야깃거리이고 굴 깊은 곳에 숨겨둔 도토리 몇 알과 같다. 달콤하고 새콤한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쓰고 떫은 이야기인지는 각자 삶의 궤적이 결정할 문제다. 내 입맛에는 이게 더 잘 맞는 거 같아 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아스라이 멀어져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버스일 뿐이다. 구차하고 미련하게 손을 흔들지 말자. 두 발을 동동 구를수록 더욱 초라한 나와 마주칠 뿐이다. 부끄러움은 순전히 나의 몫이라서 그렇다.
마음 가득 쌓인 쓰고 떫은 도토리가 자꾸 목구멍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꼭꼭 씹으려 해도 미끄덩미끄덩 빠져나가는 도토리가 그렇게 야박할 수가 없다.
"그러게 진작에 좀 열심히 살지 그랬니?"
거지 꼴로 나타나 도움을 청하는 베짱이에게 개미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유세를 떨었지만 베짱이는 뭐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자존심은 이미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없었다. 사나운 바람이 웅웅웅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