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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un 19. 2024

약해진다는 것은


그것은 마치 한계점까지 버티다 버티다 무너지는 둑과 같았다. 동시다발적으로 구멍이 뚫려 물이 새고 넘실거리던 물이 일제히 둑을 넘어 쏟아져내리는 형국이다. 쇠락한 누옥에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우지끈 대들보가 부러졌다. 대들보 부러지는 소리에 놀라 기왓장이 추풍낙엽처럼 쏟아지고 젖은 바람벽은 창호지처럼 찢겼다. 모든 것은 순간이었고 찰나였다.

담갔던 발 하나를 슬그머니 빼는 꼴이다. 더는 버틸 수 없을 때를 대비한 방비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계책 중 상책에 속하는 게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듯 미리미리 담갔던 발을 빼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잘하는 일이다. 청천벽력처럼 황당한 일도 없을 터여서 슬금슬금 돌개바람이 불고 멀쩡한 길바닥에 돌부리 하나 삐죽 튀어나와 어깃장을 놓는 건 반가운 일일 터였다.

바람 빠진 풍선 하나 가슴에 덮었다. 쭈글쭈글 쪼그라들고 잔뜩 주름 잡힌 풍선이 소금에 절인 파처럼 널브러졌다.

소위 기운 빼기다. 아등바등 매달려 어쩌지 못하는 그림은 영 보기가 그렇다. 무엇이 됐든 수긍하고 체념하는 과정이 있어야 마지막 애달픔이 반감된다. 지켜보는 이나 당사자나 매 한 가지다. 고뿔 몇 번으로 시작해 신열로 들끓는 몸살을 주었다. 입맛이 달아나고 바튼 기침으로 숟가락을 내려놓게 했다. 개구리 볼따구니처럼 부풀었던 가슴이 스르르 쪼그라들었다. 마침내 바람이 빠졌을 때 먼산을 바라보았다.

때가 가까운 걸까? 툭 말 하나 뱉었을 때 노을이 붉게 탔다. 바라보는 사내놈이 그 품에 말없이 안겼다. 그리고는 이내 쌔근쌔근 잠들었다. 소리 없는 자장가였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잊힌 어미의 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친 몸뚱이 잔뜩 웅크리고서 사내놈은 잠이 들었다. 초록이 단풍으로 물들었고 이슬은 서릿발로 낯을 바꾸는 시간이었다. 다가서는 충격파에 대비한 일종의 체념이었고 수긍을 위한 길 닦음이기도 했을 터다.

그렇게 약해지고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마음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몸이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동시에 찾아든 노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쉽고 서운하지 않은 세월은 없듯 미련이 주렁주렁 매달린다고 해도 딱히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달리 뭐가 있을까. 몸이 야위고 마음이 바삭하게 말랐다. 한 줌 바람에도 천 리 밖으로 훌훌  날아갈 거미의 빈 껍데기였다. 다시금 꽃이 피었고 소나기가 몰려간다. 단풍 곱게 물든 들녘엔 가을이 소담스럽게 여물 터였다. 그렇게 피고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하여, 나는 자연의 한 점일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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