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시인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 이제니
나는 들었다. 그것을. 그 실을.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너는 너와 내가 실을 쥐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너의 마지막 또한 그러했으리라고 짐작한다. 너와 내가 쥐고 있던 실.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붉은 실. 닳아가면서 희미해지는 실이 있었고. 희미해지면서 끊어지는 길이 있었고. 쥐고 있으면서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나는 뒤늦게 들었고. 나는 뒤늦게 짐작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나누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이었는지. 나누어 쥐고 있는 실의 한쪽 끝을 누군가 영원히 잡고 있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너는 알지 못했고. 아니. 나는 알지 못했고. 어쩌면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로 인해 너와 나는 오래오래 연결될 수 있었고. 오래오래 나눌 수 있었고. 그때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길 속에 길을. 길 속에 길을. 내고 내고 내고 내면서. 걷고 걷고 걷고 걸어가면. 가려는 그곳으로 어느 날에는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도착하게 되는 것은 붉고 둥근 열매의 안이었고. 열매는 속으로 속으로 들어앉는 것이었고. 열매는 자꾸만 자꾸만 죽어가는 것이었고. 붉은 것은 눈시울만이 아니어서. 나아가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어서. 머리와 머리를 만져봅시다. 주름과 주름을 들여다봅시다. 피부와 피부를 쓰다듬어봅시다. 그러나. 말의 호흡보다 더욱더 빨리 느슨해지고 있는 실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실의 긴장을. 천천히 천천히 사라져가는 실의 실감을. 지나온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고 말하면서. 조각났다고 전해지는 마음들을. 찢기었다 다시 붙은 살처럼. 부러졌다 다시 붙은 뼈마디처럼. 이전보다 단단해진 말들을 말아 쥔 손가락 사이에 숨겨놓았으나. 이전보다 단단해진 말들은 어느새 새어 나와 이전의 연약한 말들을 소외시키고 있었고. 새로운 자리를 발견하려면 새로운 그림자를 좇아가야 한다. 꿈속에서 너는 말했으므로. 그것은 의지와 무관한 쪽에 앉아 있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것은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이잖아요. 그것은 잃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이잖아요. 서로의 가장 허약한 면을 발견하게 됐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어떤 사랑들처럼. 나는 보았고. 나는 들었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을. 둥근 실을. 무언가 끊어진 후에야. 실감을 하게 되는 어떤 실을. 하나의 손이 하나의 실을 놓쳤으므로.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높이와 깊이로 스며들었으므로. 붉은 실.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남겨진 자리에 놓인. 실의 균열을. 실의 경련을. 나는 들었다. 그것을. 그 실을.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 붉은 실. 들었다. 그것을.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129쪽
나는 그래
너와 나와 실을 한 단어로 발화하자면, 운명이려나.
운명은 가혹하다는 전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업고 어디든 따라다닌다.
그것 혹은 그 일은 어쩔 수 없었든, 알 수 없었든 놓친 것 따위는 눈여겨보지 않는다.
난 이를 '비로소 찾아왔구나'라고 말하곤 한다.
운명 대신 너도, 나도, 아무것도 지칭할 수 없어 뭐든 이름 붙일 수 있는 실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을 보세요."라고 말한다.
물론 연습이다.
이 세상을 살려면, 아니 적어도 내 세상 안에서 버티려면 연습만이 살길이다.
무엇을 위한 연습인지는 당연히 예상할 필요 없는 부분이니 답할 필요 없다.
대신 연약하고 연약하다는 말을
마음의 실타래 안에 어떻게든 가둬놨다고 하면 된다.
운명을 지우개로 지운다. 쉽다.
손에 얼마나 잡혀있는지 알 길이 없을 만큼, 쉽다.
난, 가끔 예측할 수 없음을 걱정하다 놓아버린 것들을 생각하다,
꼬리를 물고 온 희미해지는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내곤 한다.
"아,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게 뭐였더라. 아, 나구나, 너구나, 그 실이구나."
운명을 회피하는 일보다 쉽고 운명을 다른 것으로 쥐고 흔드는 것보다 쉽다.
뭐든, 쉽다.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실이 운명이 아니더라도 아무 문제 없듯이.
그래서 쉬운 걸까, 싶지만 그다음 물음표는 만들지 않기로 했다.
물음표의 끝에 걸리면, 누구든 자기 일부를 잘 걸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또 한 번 사람을 떠올렸다. 인연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게 잠시 다행스러웠다.
보고 듣고 남겨진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 잊은 것들을 잡고 있는 거라면
운명이 가진 가혹함은 물렁한 가시일 뿐이란 그런 생각도 함께했다.
생각과 한 침대에 눕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걸 알면서
또 생각을 해버렸다. 그것도 하필 물음표 끝에 옷을 걸고서.
꿈일까. 어쩌면 나일지도 몰라, 당연한 불가항력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뭐든, 생각하기 쉬우니까.
그럼에도 항상 연습에 몰두한다.
빠져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놓쳤다 말하고 기지를 발휘해 눈 하나를 잃고 나와
호기롭게 여전히 붙잡고 있는 '무엇'으로 눈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는
그런 과정을 할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나뿐이니, 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