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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SATANG BAR에서 / 박정대 시인

©박정대, 2011,『삶이라는 직업』

by 우란

50 SATANG BAR에서 / 박정대



컵라면이 익어가는 동안 창밖의 구름을 본다

흘러가는 구름의 경로는 고요하고도 섬세하다

쓰레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인류가 여전히 역겹지만

50 사땅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은

내가 쓰레기라는 사실을 잊는다

평생을 망각의 구름 위에 띄우고 살 수 있다면

인류는 위대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컵라면이 익어가는 동안 내 부질없는 욕망은

빠이 강의 물줄기를 따라 순하게 흘러갔다

꿈이 있었기에 인간은 쓰레기통 속에서도

스스로 아름다운 강물과 나무와 음악을 만들어낸다

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불빛들을 만들어내겠지만

불빛의 꿈이 한낱 쓰레기를 보태는 일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쓰레기통 속에서

음악을 생산하는 노동자

컵라면의 내면이 아주 고요하게 익어

서러운 영혼들의 배고픔을 다 덮어줄 때까지

50 사땅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망각을 살아내는

나는 아름다움 협잡꾼

밤하늘을 흐르는 구름의 경로를 읽으며

여전히 바람 발굽을 따라 어디론가 이동하는

바람의 여행자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2011,『삶이라는 직업』

49-50쪽


나는 그래

잊음이 아까워 수첩을 샀다.
뭐든 기억하고 싶어서 적고 또 적었다.
수첩에 이름도 지어줬다.

기록이란 성격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절절한 감정들로 채운, 일기.

한동안 일기로도 하루가 살아졌다.
여러 갈래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특정 마음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정성스레 기록하는 일이니
힘들지도, 지겹지도 않았는데

돌연 '50 사띵 바에서'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인류가 위대해질 수도'
반대로 한없이 측은해질 수 있는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음을.

기억과 망각.
기억함으로써 잊고
잊음으로써 기억하는.

다신 볼 일이 없는 일기
다신 들을 일 없는 사연
다신 들출 여유가 없는 삶이지만,
심지어 '컵라면이 익어가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만
'쓰레기통 속에서' 맥주 한잔으로 기어코 쓰고 마는-

나도 '여전히 ' '생산하는' '여행자'.

잊음이 아깝지 않아 수첩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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