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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플럭서스 / 박정대 시인

©박정대, 2011,『삶이라는 직업』

by 우란

나의 플럭서스 / 박정대



달력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서른한 개의 날들, 가끔은 서른 더 가끔은 스물아홉 스물여덟


나의 한 달은 게으른 침대에서의 영원, 나의 한 계절은 침대에 누워 꿈꾸는 한 세상


창문 밖으로 세상의 바람이 불었다, 구름들은 점진적으로 이동하고 나는 그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에서 꿈꾸었다


낯선 공항과 낯선 공기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삶


삶은 유동적인 것 끊임없이 출렁거려야 삶인 것


꿈꾸는 자들의 달력은 어느 해인가 해당화 속에서 피어나고 있나


구름 위를 지나본 사람들은 안다, 천국과 지상이 구름의 장막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구름 위를 지나 당도한 또 다른 행성에서의 삶,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안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그대가 꿈꿀 때마다 불어오는 세계의 숨결, 그대와 나는 세계에 가장 충분한 심장이다 삶이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그대의 왼손을 나의 오른손이 잡고 걷고 있다


그대와 내가 이 세계를 걷고 있다

그것이 삶이다


플럭서스 플럭서스 움직이는 나의 사랑이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2011,『삶이라는 직업』

20-22쪽



나는 그래


결국 필요한 건 하나다. 우린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얼마큼 삐딱하고 얼마나 날 선 이야기를 쓰고 있든지 간에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파도와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그림자가
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겐 가혹하고, 또 다른 이에겐 친절하겠지만
우린 결국 흐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시간 안에서 열심히 두 발과 손을 흔들어야 한다.
중심을 잃으면 이탈하고, 이탈자에겐 마음 아픈 날만 수두룩하다.

무척 약 오르지만 어쩔 수 없다.
생이 그렇다고 하고,
삶이 다 그러하다고 하니.

우린, 특별한 자들이다.
모든 문이 활짝 열려 있지만,
섣불리 내리지 않기로 다짐한 채
아주 긴 긴 버스를 타고 헤매는,
그런 직업을 갖고 사는-

끝없는 변주에도
모르는 척
끝없이 나를,
두서없이 밀려들어 오는 내 생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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