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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 Aug 13. 2023

내 라면 사랑의 기원

2층 짜리 마트에서도, 단층 짜리 슈퍼에서도 내 마음은 한결 같다. 가장 좋아하는 코너를 매번 망설이지 않고 짚을 수, 아니 찌를 수 있다. 채소를 감싸고 도는 희뿌연 미스트가 흘러넘쳐 발 끝을 반기고 통통하게 살 오른 노랗고 빨간 제철 과일이 가슴 춤 아래에서 촤르르 펼쳐져도, 나는 어린이가 아니다. 그런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러니 턱을 약간 들고 30도 위로 시선을 뻗어 전방위를 스캔하여 ‘라면’ 안내판을 찾는다. 안내판이 없는 슈퍼나 편의점은 오히려 쉽다. 상품 매대가 벽 한쪽에 붙어 있는 슈퍼는 입장하자마자 라면이 눈 앞에 있을 확률이 80%이다. 매대가 2겹 정도인 편의점은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약삭빠른 MD실에서 라면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제품이니 가장 안쪽에 둬 손님들이 편의점 내부를 샅샅이 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둥실 뜨고 머리가 돌아가는, 빠르게 걸어갔다 한없이 시간을 보내는 그곳 라면 코너에는 바다도 있고 들도 있고 도시도 있고 촌도 있다. 수산물이 뛰노는 해물라면, 푸른 채소들이 모인 야채라면, 그 옆으로 서울 3대 닭갈비 맛집의 양념을 빼다 넣은 비빔면, 이름 모를 버스정류장 옆 국수집 비주얼의 칼국수면이 한 폭에 펼쳐진다. 게다가 노랗고 빨갛고 파란 육각형 6개입 봉지가 착착 쌓이거나 1개입이 책처럼 촙촙 겹쳐진 모습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10분이면 게눈 감추듯 사라질 라면 한 그릇에 ‘기원’이란 단어까지 들먹인 게 분수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으나 나에게는 마땅한 일이다. 라면 두 글자는 바라만 봐도 이렇게 마음을 꿈틀거리니까. 그렇다면 이 힘의 원천을 쫓아야 하는 게 도리다.


‘라면’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초의 장면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는 할아버지 뒷모습이다. 할아버지는 곧 내 앞의 낮은 상에 저 라면을 가져와 같이 한 젓가락씩 나눠 먹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좀처럼 밥상을 차려 먹는 법이 없었다. 밭일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냉장고에서 김치통 하나 꺼내고 싱크대 한 켠에 치워둔 어제 먹다 남은 고등어나 전어를 끌고 와 밥 조금 퍼서 싱크대에 서서 먹었다. 그가 상을 차리는 경우는 어린 나와 라면을 먹을 때였다. 아마도 ‘요똥(요리똥손)’인 할아버지가 가스레인지를 쓰는 유일한 순간이 라면 끓일 때였을 성 싶다. (할머니가 맨날 상을 차려줘 버릇이 잘못 든 까닭이지만 생선 손질이나 밭에 감 따는 일, 농약 치는 일 등은 맡아 했으니 셈셈인 것 같기도 하다.) 냉장고 속 남은 식재료로 요리를 상상하고 간을 보며 여러 소스를 뒤섞어야 하는 일은 복잡하다. 반찬 투정하는 ‘저것’의 기준을 충족할 확률이 현저히 낮다. 그렇다면 라면이 답이다. 나눠 먹기에 편하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다. 따듯하고 짭짤해 밥이랑 먹기에도 좋고 계란 하나만 풀어도 호화스럽다.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가 자신의 편리와 어린 ‘저것’의 눈치 사이에서 선택한 라면이 좋았다. 헤벌레하며 먹었다. 


두 번째 장면은 고등학교 2-3학년 쯤 아침 밥상. 맞벌이 부부로 연년생 둘을 키우기 어려워 외가댁에 맡겨진 어린 ‘저것’은 이제 부모님댁에서 중고생으로 산다. 엄마, 아빠는 여전히 출퇴근하는 삶이었고 특히 엄마는 부산 동쪽 끄트머리에서 서쪽 도시 창원으로 출퇴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부산 시내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다음 창원행 버스로 갈아 타고 다시 창원에서 시내 버스로 출근하는 하루.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 고난 같은 출근길에도 엄마는 아침마다 밥을 차리겠다고 용을 썼고, 그 용 쓰는데 자주 등장하는 용병이 라면이었다. 오전 6시 30분, 세 봉 끓여 식탁에 내려 놓으면 언니와 나와 아빠가 몰려들어 후루룩 뚝딱 해치우고 각자 살길 찾으러가는 사람들처럼 뿔뿔이 흩어졌다가 밤이 되어 만났다. 돌아보니 라면은 엄마가 제 새끼들 먹여 학교 보내겠다는 의지였고 언니와 나와 아빠는 오늘도 잘 살겠다는 다짐이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자주 먹어?” “돈 없거나 시간 없을 때  먹는 거 아냐?” “몸에 안 좋대. 그만 먹어” 오늘도 라면 먹겠다는 나를 보고 남편도 친한 친구도 한 마디씩 한다. 마음이 쪼그라든다. 이 따듯하고 차고 짜고 시고 달달한 면과 국물을 5분이면 만날 수 있는데, 이것과 곁들여 먹기 좋은 음식도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이렇게 하대하나. 사실 편의점도 라면을 귀하게 대접해 안쪽에 꽁꽁 넣어 둔 게 아닐까. 우리 할아버지와 엄마는 내 마음을 알 거다. 바로 물을 올리고 라면 한 봉을 꺼내줄 거다. 라면 덕분에 내 키가 크고 내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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