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6일 금요일
1학년 6번 '작은 나'의 일기장
2023년 8월 20일 일요일
'큰 나'의 일기장
단순하다. 이 시간에 저 일을 했다는 증언에 의심할 건덕지가 없다. 맑기로는 물이라면 산기슭에 졸졸 흐르는 시원한 냇물 같고 바람이라면 나무 하나 없는 동산에서 팔 벌리고 맞는 산들바람 같다. 7살, 1학년 첫 방학을 보내고 개학 후 처음 쓴 일기이니까 점수를 좀 후하게 줘도 괜찮다. 처음 이 일기를 보았을 때는 ‘와, 생각이란 게 1도 없는 때였구나’ 싶었고, 오늘 이 일기를 써볼까 생각하고 다시 보았을 때는 ‘지금의 내 일도, 생활도 이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부러워했다. 미루고 당기고, 망설이고 내달리고, 부끄럽고 용기내고, 까먹고 좌절하고 웃는 모든 일들이 종종 버거운 서른다섯이라 그런 것 같다.
오늘은 크게 종종거렸다. 실은 별 게 아닌데 .... 별 일이었다. 내 일은 책과 글을 편집하는 일. 책을 인쇄하기 전 내용을 다시 확인하던 중이었다. 오늘의 미션은 지면에 적힌 이름과 고유명사에 오탈자가 없는지 단단히 한 번 더 확인하는 것. 이러한 내용을 다룬지는 2주가 넘은 터라 빤했다. 게다가 겨우 6쪽짜리 PDF였다. 근데 일을 하다보면 그렇다. 마치 초능력이라도 입은 듯, 마치 다른 세계에 가서 안구를 갈아 끼고 온 듯 불현듯 안 보이는 게 보일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띄어쓰기 문제였다. 외국 사무소의 이름인데 영어로 띄어 쓰길래 한글에서도 음절을 띄웠는데 용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최근에는 붙여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헐! 뉴스 웹사이트에서도, 서점 웹사이트에서도, 논문 웹사이트에서도 검색값이 하나 같았다. 다들 붙여 쓴다. 심장이 벌렁벌렁, 머리가 웅웅. 오자가 아니기에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정답이 아닌 게 되었다. 이미 일부분은 이 띄어쓰기 된 버전으로 인쇄 들어간 상황. 눈 딱 감고 그냥 넘길까, 상사에게 보고해 변경을 요청할까. 저 손톱만한 1mm 틈 앞에서 마음 속 전투가 일어났다. 이럴 때면 이 일을 당장이고 그만두고 싶다. 왜 이런 일을 밥벌이 삼았나 싶다.
그래서 1단계, 외면했다. 다른 쪽부터 보고 생각하자. 30분이 흐르고 다시. 2단계, 갈팡질팡을 시작한다. 모른 척할까, 바른대로 말할까. 각각의 선택에 최악의 수는 무엇인가. 모른 척 했을 때 최악은 책이 나온 당일 사무소 담당자가 보고 “틀렸잖아요? 저희는 이렇게 쓰지 않아요. 실망이군요. 책임을 묻겠어요. 다시 만들어주세요.”하는 것. 알리고 수정했을 때 최악은 무엇인가. 상사 및 관계사가 “이 때까지 이걸 몰랐어요? 도대체 몇 번을 말했어요? 잘 확인하라고. 정말 당신과는 다시 일하고 싶지 않군요.” ....... 으악.. 다시 짧은 외면에 들어간다.
결국 40분째에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쓴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계단실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근데 (오늘 나의 천운으로) 상사는 온화한 음성으로 해당 사무소에 확인해보고, 결정을 짓자고 했다. 확인 결과 붙여쓰기가 옳단다. 앞서 한 건 그렇게 못했지만 지금부터 맞추겠다는 상사의 사과와 알겠다는 사무소의 답으로 내 2시간의 심란 대첩은 불이 꺼졌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휩싸여 상상한다. 오는 9월에는 저 초딩처럼 깨애끗하고 발랄한 마음으로 작업실에 가야지. 첫째 시간에는 책을 읽고, 둘째 시간에는 일을 하고, 셋째 시간에는 커피를 먹어야겠다. 점심은 밥, 국, 김치를 내 손으로 차려 먹는 것으로 삼삼한 어른 티를 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