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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l 13. 2019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이 시간에 나는 왜 기타를 치거나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고 글을 쓰는가?

'유혹하는 글쓰기'의 스티븐 킹이 주는 몇 가지 제안을 생각해 본다. 쇼생크 탈출, 미저리 등에서 보인 이야기 전개는 작가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에서 비롯한다. 그가 진지하게 제안하는 창작론은 글쓰기의 정석이라 할만하다. 


글쓰기에서 자기가 가진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장들을 골고루 갖춰놓고 그 연장통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팔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  
자주 쓰는 연장들은 맨 위층에 넣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는 연장들은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어휘)'들이다.
문법도 연장통의 맨 위층에 넣어야 한다. 
문장들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문법 규칙에 맞춰 구성해야 한다.
"잘 쓸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규칙을 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에서 기교보다 기본을 중시하는 작가이다. 그가 기본으로 꼽는 것은 어휘, 문법, (문장) 규칙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에 기교와 수식에 치중하는 것은 연장통 없이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수리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다. 물론 연장통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기본에 충실할수록 연장통은 무거워질 텐데 이를 들고 다닐 '팔심', 소위 끈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심한 작가들은 수동태를 좋아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부사를 쓰지 않으려고 동사에 잔재주를 부리지 마라. 글이란 다듬어진 생각이다. 전보문처럼 간결한 문체가 글의 흐름에 변화를 주고 신선한 느낌을 불어넣는다.


이런 글은 'XXX를 한다'보다 'XXX이 된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XXX이 되어진다', 'XXX로 보여진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수동적 표현인 '된다', '보인다'보다 훨씬 자신감이 없는 표현이다. 이처럼 과잉 수동태는 작가의 주관을 나락으로 떨어 뜨린다. 아울러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한 문장에 몇 개의 부사를 넣는 경우가 있다. 형용사도 마찬가지다. 과잉 수식은 글의 흐름을 방해한다. 스토리를 살리고 그것에 집중하라. 최소한의 간결한 문장으로 스토리를 살려라. 독자들이 속도감이 있는 글이라고 느낄 만큼 빠르게 진행하라.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 시간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 진실한 글을 쓰려고 한다면 어차피 여러분의 사교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날마다 꼬박꼬박 쓰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생기를 잃기 시작한다. 창작교실에서 흔히 가르치는 금언은 '아는 것에 대하여 쓰라'는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런데 아는 것이 많아야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낱낱으로 흩어진 경험 사이의 연관을 만들고, 경험을 연결하며, 새로운 상황과 인물을 창조하려면 '알고 있는 것'이 많아야 하고 이러기 위해 많이 읽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사항에 대하여 쓸 때조차 아는 것을 기초로 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라. 주장을 밝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관련 문헌을 되도록 많이 읽는 것이 좋다. 어떤 글에 참고문헌이 많다는 것은 작가의 소신이 약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관련 정보를 획득하고 소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허구를 다루는 소설은 어떨까. 소설은 매력은 '있을 법한 일을' 기술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데 있다. 당연히 작가는 있을 법한 일을 창조하기 위해 많이 경험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내가 보기에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narration),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description), 등장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dialogue)가 그것이다.


소설이 '지루해져서' 독자들이 중도에 책 읽기를 포기하는 경우, 그 지루함은 작가가 자신의 묘사력에 스스로 도취한 나머지,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최우선 과제를 망각한 탓일 때가 많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눈여겨보는 일, 그리고 본 것에 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스트븐 킹은 기본에 충실한 작가라 했다. 초심자는 기본에 앞서 글을 꾸미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다 보면 문장이 길어지고, 독자의 호흡과 불일치하며, 종국에는 스토리 전개를 방해한다. 과잉 수식은 좋은 글의 적이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상황을 간결하게 묘사하라. 등장인물을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라. 작가의 글로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장황하게 하는 것보다 주인공의 대화 안에서 심리를 묘사하라.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플롯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첫째 우리의 '삶' 속에도 플롯 따위는 별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둘째, 플롯은 진정한 창조의 자연스러움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연장통 속의 연장들을 사용하여 각각의 유물을 최대한 온전하게 발굴하는 것이다.


플롯(Plot)이란 소설에서 사건의 논리적인 패턴과 배치, 즉 이야기의 구성이다. 모든 소설에는 플롯이 있다. 스트븐 킹이 플롯을 믿지 않겠다고 한 것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 삶 속에 플롯 따위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플롯이 창조의 자연스러움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플롯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소설 안에서 '작위적 구성'을 만들어 내지 말란 이야기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최대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간결한 문체로 풀기 위해 과도하게 '설정'하지 말한 말이다. 우린 이미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오죽하면 상대의 행동을 보고 '설정하지 말라'는 말을 할까. 


결국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은 조개껍질 속으로 스며드는 모래알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일상적 방해는 늘 있다는 말이다. 즉 '쓰고 싶다'가 아니라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욕구만으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쓰지 못한 사람에 물으면 백 가지도 넘는 이유가 나온다. '삶이 힘들어서, 워낙 바빠서, 친구를 만나다 보니, 가족이 방해를 해서...' 글을 쓰지 못했다는 이유는, 역으로 글쓰기의 소재가 풍부하다는 말이다. 힘든 삶을 그대로 쓰면 좋은 글이다. 바쁜 이야기를 쓰라. 친구와 나눈 대화를 글을 옮기고, 가족이 어떻게 방해하는지 글로 묘사하라. 지천으로 널린 글쓰기의 소재를 두고 글쓰기를 방해는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하다. 


불분명한 비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의견들은 실질적인 조언이 아니라 그냥 허세일뿐이다.


대개 서평의 구성은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와 글에 대한 찬사로 일관하다가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느낀 점에 대하여 쓴다. 정말로 작가와 독자를 위한 서평이라면 모호한 찬사로 일관하여 독자의 눈을 흐리게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써야 한다. 나 역시 종종 추천사나 서평을 의뢰받는다.  마음먹고 비평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나에게 서평을 의뢰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정직한 글을 쓰려 노력한다.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곤 한다.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 시간에 나는 왜 기타를 치거나 모터사이클을 타지 않고 글을 쓰는가? 애당초 이 고달픈 일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며 또 어째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이 말은 스티븐 킹의 자기 고백인 셈인데, 글 쓰는 행위에 대해 늘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글은 작가의 의식을 거쳐 밖으로 나온다. 무의식으로 일관해도 좋은 글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 '글이 막힘없이 줄줄 나온다'는 말이 있다. 막힘 없이 줄줄 나오는 글을 부러워하지 말라. 어찌 됐든 글은 작가의 의식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실존적 고뇌 없이 의식이 풍부하게 형성될 리 만무하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물론 글은 작가의 실존적 고뇌를 반영한 예술적 결과물이다. 스트븐 킹은 그 길이 힘겨운 여정이라 할지라도 견디고 극복하라고 제안한다. 글을 쓰면서 겪게 되는 작가로서 고통과 또한 행복감은 서로 맞닿아 있다. 글쓰기가 마술과 같다고 해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지 않는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은 물론 진부함까지도 생생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서사적 상상력으로, 사회적 참여로 연결해야 한다. 결국 부단히 읽고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지루하고도 먼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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