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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r 26. 202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도시는 인간에게 편익과 효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구성원들을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벽'은 공간 구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벽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안전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분하고 나아가 차단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소설은 '있을 법한 거짓말'을 다룬다고 생각해 왔다. 독자들은 이 점을 알면서 소설을 읽는다. 그 거짓말이 충분한 개연성과 맥락을 갖기를 기대하면서. 대략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1부를 읽을 있다면 이 소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부는 속도감 있게 빨려든다. 3부는 정리 및 추가 설명의 느낌인데 짧은 분량이다. 없어도 될 뻔했다. 주인공과 소년 M은 벽 안의 도시에서 현실 세계와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벽은 현실의 규범, 책임, 억압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경계임과 동시에 고립감, 외로움, 무기력함을 상한다. 또한 벽은 화자의 내면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이자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아를 완성해 가는 출발점이다. 벽 안의 도시가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상상과 꿈이 실현되는 공간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주요한 근거이다. 


하루키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과 소외를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과 소년 M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존재이다. 주인공은 과거의 상실과 아픔을 떠올리며 현재를 살아간다. 시간의 흐름은 주인공의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지속적으로 연동한다. 하루키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재즈와 클래식은 이 소설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도시가 현대사회의 무기력함과 단절감을 상징한다면 음악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매개로 도입된다. 

벽 안의 도시는 획일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의 상징적 대안으로 제시되지만,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보여준다. 그러나 벽 안의 도시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며 자아를 성장시킨다는 설정은 하루키 특유의 전개 방식이다. 결국 벽 안의 도시는 상상력과 꿈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현실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과 생활은 문학이라는 도구를 빌려 실현하는 셈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문학이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통해 느끼는 모호성이 있다. 누군가는 모호성이야 말로 하루키 문학의 속성이라면서 별도의 해석 없이 동화할 수 있을 것이다.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현대사회의 불안정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의도적 모호성이라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 소설 전반을 통하여 하루키는 현실과 꿈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꿈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은 꿈으로 녹아드는 형국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의 상호침투라고나 할까. 물론 하루키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대한 해석을 상당 부분 독자에게 맡김으로부터 비논리성을 넘어선다. 


그러나 하루키 소설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모호성 저편의 구체성'이 있다. 공간이나 입고 있는 복장, 음악에 대한 묘사 등은 그가 가진 실세계 관찰력을 반영한다. 등장인물의 옷과 모자, 스카프, 신발의 모양까지 묘사하고 나서 말을 시킨다든지, 바닥과 벽지, 테이블과 찻잔에 대한 디케일한 묘사가 있고 '어떤 차'를 마시게 한다든지 하는(모든 하루키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설정은 독자인 내가 보기에 '모호성과 구체성'의 의도적 대비이다. 특히 옷차림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그 반복이 도를 넘어 나중엔 외울 정도.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독특한 설정은 독자들에게 낯설고 불안하게 다가온다. 또한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독자들에게 강한 불안감을 안긴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과거에 대한 회상은 독자들에게 비슷한 상실감과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주인공이 잃어버린 소녀에 대한 그리움은 독자들에게 애잔한 감정을 안겨줄 것이다. 


다만, 주인공의 고독과 외로움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결론적으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낯섦과 불안감, 상실감과 회한,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상상력 자극, 위안과 공감 등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이미 발표한 자신의 소설을 40년 만에 개정, 증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키가 그런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767쪽, 작가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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