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교원교육
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학문적 세속주의

실용주의는 경제적 효율성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by 교실밖 Mar 07. 2025
아래로

세속주의는 인간의 사상이나 가치관이 종교나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속'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분들도 있긴 하지만 간단히 말해 세속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신이 사는 곳이 아닌 인간의 삶이 있는 곳이다. '학문적 세속주의'라고 제목을 단 이상(생각해 보니 '세속적 학문'이라 해도 같은 의미이긴 하겠으나 미묘한 차이는 있다) 학문과 세속을 연계하는 생각을 밝혀야 할 것 같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선 '진리' 앞에서 겸손하고 진중한 자세로 탐구의 열정을 불태우는 느낌이 배어 나온다. 대체로 이렇게 학문을 하는 분들은 지식이란 인식주체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보편타당성을 갖는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실용주의(pragmatism)'는 그 지식이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를 바란다. 사실 실용주의는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실용주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듀이가 말한 '보증된 주장 가능성(warranted assertibility)'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탐구의 결과 얻게 된, 다른 대안을 전제하는 잠정적 지식인 셈이다. 그래서 궁극적이며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분들은 보증된 주장 가능성을 상당히 괴이한 논리로 본다. 러셀은 널리 알려진 자신의 저서 <서양철학사>의 끝 부분에 10쪽 남짓을 듀이에 할애하였다.


"듀이와 나의 주된 차이는, 듀이가 믿음을 결과에 의해 판단하는 반면 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관련된 원인의 의해 믿음을 판단한다는 점이다.... 듀이 박사는 믿음이 특정한 결과를 낸다면 '보장된 주장 가능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며, 그는 '진리'를 '보장된 주장 가능성'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일탈은 세계관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러셀, 서양철학사, 1027쪽)


러셀은 듀이의 견해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였다. 하지만 '진리'를 '탐구' 개념으로 대체한 것에 관해서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진리'를 논리학과 인식론의 근본 개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모든 점에서 나는 심상치 않은 위험, 우주에 대한 불경으로 불릴지도 모를 위험을 느낀다. 대체로 인간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실들에 의존하는 '진리' 개념은 여태까지 철학에 필요한 요소인 겸손을 가르쳤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자긍심에 대한 견제가 사라지면, 다음 단계는 일종의 광기에 도취되는 길로 접어들고 만다."(위의 책 1029쪽)  

러셀, 서양철학사러셀, 서양철학사


러셀이 말한 '우주에 대한 불경'은 곧 현실에 뿌리박고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는 세속주의를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는지 웅변한다. 인간의 조종을 받지 않는 진리란 결국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진리'로 인식주체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지식을 말한다.


그런데 듀이를 비롯한 실용주의자들은 "그래, 그런데 그러한 진리가 도대체 현실에서 사회적으로 얽혀 사는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데?"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진중한 학자 러셀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 ... 힘의 도취에 일조하는 철학은 모두 끔찍한 사회 재앙의 위험을 증가시킨다"라고 확신하게 만든 것이다.


이홍우의 '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을 소개한 후 요즘 교육학 고전에 심취하신 정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듀이를 둘러싼 오해와 왜곡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러셀이 듀이에 대하여 제기한 '재앙의 위험'과 '미국 교육학의 저주와 재앙'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이 글을 쓴다.


이홍우, 미국 교육학의 정체이홍우, 미국 교육학의 정체


교육을 개선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은,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이며 '신들의 세상'이 아닌 지지고 볶는 인간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 된다. 나는 듀이가 말한 실용주의가 한국적 풍토에서 '경제적 효율성'으로 부당하게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우린 모두 선의만을 가지고 아름답고 영롱한 천상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는 대전제도 확인하고 싶다. 사실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선의지'에 대한 과도한 믿음 때문이다.


세속에선 인간들의 다양한 이해와 욕구가 충돌한다.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함께 살기 위해선 룰이 필요하고 룰 이전에 지적, 시민적 소양이 필요하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초이다.


** 6년 전 오늘 이 글을 썼다고 '과거의 오늘'이 말한다. 소셜 미디어는 과거든 미래든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는 신통한 마력을 지녔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공지능 시대와 불안세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