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기 시작하면 갈 곳이 없다 vs 제게는 그 반 집이 보인단 말입니다
잔잔하다. 영화적 충격과 반전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욕심 내지 않은 그 점이 이 바둑 영화를 빛나게 했다. 바둑 애호가에겐 실전 바둑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아쉬웠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함께 본 배우자의 말이 바둑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영화는 바둑 자체 승부가 아니라 바로 인간 내면과의 승부를 그린다. 바둑 영화이면서 인간의 영화, 사제 관계의 영화다. '이기고 지는 것'을 승부라고 한다면, 승리와 패배는 늘 둘 중 하나다. 승리는 영원이 내 편일 수 없고, 승자의 시간도 언젠가 끝이 난다. 결과로써 승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기느냐, 또한 어떻게 지느냐에 대한 것이다. 두 배우 캐스팅은 최적에 가깝다.
한때 바둑에 심취했을 때가 있었다. 해직 생활 말기 몇 개월 간 기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달랑 기료(기원 입장료) 3천 원을 가지고 바둑을 두었다. 그곳에서 공짜로 바둑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보다 상수와 바둑을 두려면 열 집 당 천 원의 수업료를 냈다. 그걸 일명 '방 내기'라고 불렀다. 첫 판에서 무조건 이겨야 했다. 지면 기료를 낼 수가 없었으니까. 몇 번이나 망신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몇 판을 두더라도 수중에 3천 원이 남아 있어야 기료 3천 원을 내고 망신을 당하지 않고 기원을 나설 수 있었다. 나중에 원장을 잘 알게 된 후로 외상 바둑을 둔 적도 있긴 했지만. 바둑을 두면서 프로 기사들의 에피소드와 '기풍'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그 기원에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내기 바둑으로 소일하는 1급(프로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 최고수)에게 여섯 점을 깔고 바둑을 배우곤 했다. 1급이 마음만 먹으면 나를 상대로 만방(91집)도 낼 수 있었고, 수중에 기료 밖에 없었던 나는 개망신을 당했겠지만, 그는 나를 나락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건 1급에게도 명예가 아니었을 터. 그는 하수들 상대로 용돈 벌이를 하다가 가끔 선수를 만나면 독립된 방에서 진검 '승부'를 벌이곤 했다.
그 1급은 낭인처럼 전국을 떠돌며 바둑을 두었다. 가끔 처절한 승부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바둑엔 무승부가 없다. 무승부를 방지하기 위한 여섯 집 '반'의 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반 집은 반상 위에 존재하지 않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오로지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기 위한 바둑의 규칙이다. 그러니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 하나다. 여기에 인간이 느끼는 희망과 절망, 실존과 허무가 다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인간 내면의 이야기를 그린다. 서로 기풍이 다른 스승과 제자의 격돌과 갈등까지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전투하는 스승: 바둑판에서 피하기 시작하면 갈 곳이 없다
계산하는 제자: 저에겐 그 반 집이 보인단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승과 제자의 전환이 일어난다. 스승의 위치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자신을 능가하는 제자가 나와 스승을 넘어서는 것, 세상사의 순리다. 영화에서 스승은 그걸 인정하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길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승부를 피하지 않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더욱 단단한 제자기 탄생했다.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바둑 영화 한 편 보고 30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 지난 얘기다. 무슨 배짱으로 판돈도 없이 내기 바둑을 했는지 원. 나란 놈도 대책 없던 시절이 있었네. 확실한 것은 그 몇 개월 동안 난 인생에 대해 많이 배웠다. 이기고 지는 것, 망신당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는 것이 지구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의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