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학교에 가면 사전을 두고 ㄱ부터 ㅎ까지 모든 단어를 배우게 될거야'라는 막연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모르는 단어를 물어볼 때마다 엄마가 "사전 찾아봐"라고 말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입학 첫날 책상 위에 올려진 것이 국어사전이 아니라 '교과서'라고 부르는 책들이라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단어를 다 모르는데 그냥 공부를 시작한다고?"
대학에 와서도 첫 직장에 들어가서도 비슷한 느낌은 반복됐다. 짜여진 시간표 내에서 살다가 갑자기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라'는 원대한 지령을 받고, 이래도 되나 싶게 수강신청을 망치고 첫 학기를 시작했을 때도 대학생활은 어떻게든 굴러갔다. A부터 Z까지 업무를 배우게 될줄 알고 들어갔던 첫 직장 첫 출근날 나에게 던져진건 '먼슬리 리포트를 작성하라'라는 지령과 함께 엑셀파일 하나, PPT 하나, 그리고 사수의 차가운 한마디. "지난달꺼 보고 따라해. 똑같이."
살다보니까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인 빌드업으로 돌아가지 않더라. '이게 된다고?' 싶게 주먹구구식인 것도 결국엔 매듭이 지어지고, '이래도 돼?' 싶게 갑작스러웠던게 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근본 J의 유전자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황당과 불안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별일 없음'을 인지하고 나니 이젠 슬그머니 용기 한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