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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피디 Sep 27. 2016

농활의 추억

하루 8시간 노동에 재래식 화장실이어도, 나는 그곳이 그립다

일요일 밤에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다큐멘터리 3일>. 언제나 따뜻한 시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에 (월요일을 앞두고) 우울한 일요일 밤의 기분을 풀어내기에 딱 좋다.


나는 보통 시장이나 먹거리가 나올 때 제일 재밌게 본다(먹방이 최고야 역시). 재래시장의 푸짐한 음식과 할매들의 인심 좋은 한 마디가 섞여 나오는 그 장면들은 그 자체로 힐링이다. 그런데 음식만큼이나 재밌게 본 에피소드가 있으니, 바로 지난 일요일에 방송된 '상주 정양리 귀농마을'의 72시간이다.




#1. 점곡면 윤암2리, 나의 시골


농촌 이야기는 항상 날 설레게 한다. 그러나 사실 난 농촌과 연이 없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부모님 또한 할아버지 대부터 서울 토박이인지라 명절이면 찾아갈 시골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촌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대학 시절 매년 갔었던 농활(농촌봉사활동) 덕분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3년 내내 농활을 갔다. 10박 11일 일정의 본 농활이 세 번, 거기에 이틀 내지 삼일 일정의 추활(가을농활)과 개인적으로 놀러 간 것까지 합치면 총 열 번 되려나.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나의 농촌은 경상북도 의성이다. 안동 옆에 있는 작은 도시이자 마늘로 유명한 곳.


그중에서도 내가 농활을 간 마을은 의성 터미널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그야말로 촌이다. 정식 명칭은 점곡면 윤암2리. 걸어서는 슈퍼도 갈 수 없고 버스 구경하기도 힘든, 간혹 가다 논에서 일하는 아버님들 외엔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든, 그런 곳이다.


그 때는 젊은이들로 바글바글했던 윤암2리 경로당.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올해 여름에 가서 찍은 모습.



#2. 헐, 하루 8시간 노동에 재래식 화장실이라니


농활은 스무 살의 나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열흘 이상 집을 떠나, 하루 8시간의 노동을 하며, 처음 만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처음 보는 농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는 것도 어색했고, 없는 재료로 우리끼리 만들어 먹어야 하는 밥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스무 명의 남녀 대학생이 함께 써야 하는 재래식 화장실은 진짜 악몽이었고(지금 생각해도 참기 힘듦), 그 더운 여름에 서툰 농사일을 하루 종일 하니 병이 났다. "엄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 힘들었다. 3일째까지는.


고된 밭일로 마치 체력장을 끝낸 것처럼 아팠던 허리와 허벅지 통증이 가시고, 동고동락하는 친구들과 스스럼없어질 때 즈음에서야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다 먹는 꿀맛 같은 새참, 경상도 특유의 시크하면서도 엄청 챙겨주시던 츤데레(?) 아버님들, 들이마시면 코가 시큰거릴 정도로 깨끗한 아침 공기. 무엇보다 단순노동의 매력이 장난 아니었다.




#3. 이걸 오늘 안에 다 한다고요?


하루는 트럭을 타고 광활한 고추밭에 내려졌다. 거기 내린 8명 모두가 '설마 이걸 다 하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아버님 왈

오늘 여기 비닐 다 깔아야 된다  


헐. 나는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밭에 비닐을 까는 건 잡초들이 고추나무를 타고 올라오는 걸 막기 위해서인데, 두 명이 비닐을 잡고 이랑을 걸어가면 두세 명이 따라붙어 나무젓가락으로 비닐을 고정시켜야 한다. 말이 쉽지 계속 허리를 구부리고 해야 하는 일이라 정말 힘들다. 다양한 농사일 중에서도 농활대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웬걸. 그날 저녁 7시,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자 그 광활한 고추밭에는 까만 비닐들이 질서 정연하게 모두 깔려있었다. 세상에. 감동받았다. 너무 뿌듯해서 사진도 찍었다. 군대에서는 군인이 모이면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던데 그게 완전 농담아님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살구 따는 아낙네


#4. "다시 와줘서 고맙다"


그렇게 농활의 매력에 빠져 나는 3년 내리 의성에 갔다. 물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첫날 저녁엔 알이 배긴 종아리를 부여잡고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여길 또 오다니.


그러면서도 매번 다시 의성을 찾는 건 역시나 '사람' 때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농활에 참여했던 그땐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열흘짜리 여행이 너무 좋아 계속 갔고, 그 후로는 아버님 어머님이 보고 싶어 계속 가고 있다.


이번 여름엔 이장님댁 마당에서 바베큐 파티. 사실 먹으러 간다.


이제는 '아부지'라고 부르는 우리 이장님이 내게 주신 선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두 번째 농활을 마무리하는 마을 축제 날, 아버지는 손수 오동나무를 깎아 머리핀을 만들어 주셨다. 완전 경상도 상남자인 이장님이 핀을 만들어 주시다니.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왜 안 만들어줘요 아부지!'라고 장난을 치는 후배들에게 이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도 내년에 또 오면 만들어 줄게.


그 후로도 아버지는 내게 몇 번을 말씀하셨다. '또 와줘서, 다시 와줘서 고마웠다고'.




그곳에 가면 이장님 말고도 '아부지, 어무니'가 많다. 놀러 가서 이장님 댁에 묵을 때면 삐진 분회장님이 막걸리를 들고 찾아오신다.


니는 아부지 집 두고 삼촌 집에 와 있으면 되나!


언제든 찾아가도 이리 잘 곳도 많고, 예뻐해 주시니 내가 의성을 잊을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단점은! 가면 깨어있는 내내 먹어야 한다. 한 시간도 쉬지 못한다. 잘 못 먹으면 혼난다. 가방도 큰 거 챙겨가야 한다. 올 때 몇 박스씩 양파며 사과를 챙겨주시니까.


이렇게 쓰고 보니 더 죄송하고, 그립고, 애틋하네.


아! 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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