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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피디 Oct 17. 2016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금수저의 나라에서 누가 감히 우리에게 노오오오력을 운운하는가?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이 된 뒤로 사람들은 빈부격차를 이야기함에 있어 더 서슴없어졌다. 본래 한국인들의 오지랖은 하해(河海)와 같아서 외국에서는 상식적으로 터치하지도 않고 궁금해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당연한 듯이 물어보곤 하지만, '금수저'라는 적당한 용어가 생김으로 인해 가정환경이나 빈부격차와 같은 것들이 더욱 가볍게 입에 오르내리게 됐달까.


가령 예전에는 본인 능력이 떨어지는데 집이 잘 살거나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어서 그 덕을 보면 스스로는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는 느낌이라도 있었다. '쟤는 아버지 덕에 ~했대' 하면서 쑥덕대는 분위기에 당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금수저'가 훈장이 됐다.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공식적인 스펙으로 인정받고, 심지어 노력으로 쌓은 어떤 것들보다도 가치 있게 여겨진다. 최순실 게이트가 열리고 그녀의 딸은 과연 부끄럽게 여길까? 아니. 최순실과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거다. "이게 당연한 것"이라고.

 



부모의 재력과 명예를 배제한 뒤에 스스로가 정말 열심히 해서 얻을 수 있는 사회의 타이틀은 대학까지다. 아직까지 수능은 그나마 공평하니까. 강남에서 수천만 원 과외를 받든 나 혼자 십만 원짜리 인터넷 강의를 듣든 수능 1등급을 받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물론 요즘에는 대입에서도 돈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데 개천에서 나는 용은 딱 거기까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는 시작된다. 


등록금과 학원비, 생활비를 아빠 카드로 긁으면서 가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여가시간에는 운동을 배우며 아무 걱정 없이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다녀올 수 있는 학생과, 평일 저녁과 주말을 쪼개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겨우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대학생의 삶은 극명히 다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격차는 더 커진다. 취직 때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여기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질문이 아직도 떡하니 이력서에 박혀 있는 조선이니까. 헬조선. 학자금 대출을 갚고 집을 사야 하는 20대 후반이 되면 말할 것도 없다. 그쯤 되면 카스트제 정도로 견고하게 계급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겪어보니 이런 황금만능주의적인 사고는 본디 금수저인 사람들만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이전 직장 대표는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라 불릴 정도로 본인 능력으로 부를 일군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부에 대한 편협한 사고는 그녀 자신을 너무나도 촌스러워 보이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신입이 일을 못하면 인신공격을 일삼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들어온 신입에게는 유독 조용한 거다. 나중에 나한테 하는 말이

oo이는 잘할 거야. 걔 청담동 살잖니.


헐?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농담인 줄 알았다. 한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비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또 그걸 입 밖으로 나는 천박함은 뭔가. 그런데 농담이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교수가 회사에 신입을 소개하여주지 않는다며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 ××회사에는 예쁘고 일 잘하고 '잘 사는 집' 애들도 많이 소개하여줬다던데, 뭐니 그 교수?

라는 거다. 중요한 건 그 회사에 오래 다닌 시니어들 대부분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직원의 집안 배경을 수도 없이 안주거리로 올리는 걸로 안다.


대체 PR을 하는데 집이 잘 사는 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더 세련된 홍보를 할 수 있나? 아버지의 인맥을 활용해 기사를 내나? 기자들한테 을의 입장이 아니어도 되나? 난 아직도 의문이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사고를 갖고 있다. 그나마 내가 대표와 같은 대학을 나왔고 일을 좀 잘 한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받진 않았지만, 그 사람과 있으면서 나는 어서 그 회사를 나오고 싶었다. 아직은 내 청정한 정신이 그런 천박함에 물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언젠가는 꼭 한 번 내가 금수저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대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입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무슨 일로 벌어먹고 사는지는 왜 이야기해야 하며,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왜 궁금한가? 내 엄마가 최순실이라도 되면 대표가 나한테 존대를 할 건가? 아니면 내 아버지가 막노동을 한다고 하면 입사 취소를 할 건가? 정신줄 똑바로 잡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기엔 난 너무 열심히 살았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고액과외 한번 없이 괜찮은 대학에 왔고, 대학에 와서도 단 한 번도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으며, 내 전공과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다.




최순실의 딸은 아무 노력 없이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이 나라에서

누가 나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많은 청춘들에게 노력을 운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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