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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은 Mar 07. 2018

옥수수 껍질 까기, 좋은 콩 골라내기

- 마프라/스트랫포드 로드 (Maffra/Stratford Rd)



  이 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람 소리다. 들판의 흔들리는 옥수숫대, 나무의 잎사귀, 새들의 지저귐 사이로 굽이돌던 바람은 막사의 지붕을 오르내리며 구멍 난 벽을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왔다. 바람은 머리카락과 콧구멍 사이를 숭숭 스치듯 달아났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회오리바람처럼 나는 사방에서 침입하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었다.



  호주 빅토리아주의 스트랫포드(Stratford) 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그 시간에 나를 맞이한 건 밤하늘을 수놓은 별이었다. 하늘은 높지 않았고, 우주는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별들이 강줄기처럼 길을 만들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은하수였다. 두 다리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도저히 그 자리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누군가 후 불면 내 몸은 날아가 버리거나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직 방향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어서였을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 좀 더 쉬워질 줄만 알았는데, 자꾸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때는 중력도 소용없다. 우주 한가운데 떨어진 것처럼 진공상태로 부유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고독의 상태일까. 나는 가방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무엇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던 것이다. 


  도심에서 3시간이나 떨어진 마을까지 오게 된 이유는 농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농장의 주된 업무는 옥수수의 껍질을 까거나 콩을 박스에 담는 일이었다.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는데, 다음날 곧장 새벽일을 나가게 되었다. 일손이 부족하여 대기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첫날 내가 맡게 된 작물은 그린 빈이었다. 거대한 세척 기계를 통과한 그린 빈은 4개의 레일에 고루 나누어졌다. 레일은 진동방식으로 모래나 이물질을 털어냈고, 이후에는 사람이 육안으로 질 나쁜 콩을 골라냈다. 미끄럼틀 같은 매끈한 기계는 강력한 진동으로 콩을 마구 뒤집어댔다. 크기가 작거나 색이 바래거나 완전히 익은 것들은 주저하지 않고 걸러내면 되었다. 콩이 무더기로 레일을 타고 내려오면, 1초에 서너 개를 골라내야 했다. 검수를 통과한 콩은 박스에 담겼다. 그 박스의 개수가 노동의 증거이자, 우리가 받게 될 돈의 값이었다. 한 레일당 4~6명의 인원이 마주 보며 콩을 고르고 레일 끝에 선 사람이 박스에 담아냈다. 4개의 레일이 돌아가니, 그린 빈 파트에만 대략 20명 정도의 인원이 투입되었다. 1시간에 1톤 트럭을 가득 채운 콩들을 분류할 수 있으니, 온종일 일을 하게 되면 8톤 정도의 콩을 분류한 셈이 된다. 레일은 끝없이 진동하며 콩들을 씻어내었고, 가끔 초록빛 콩들은 애벌레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옮기게 된 파트는 옥수수였다. 레일을 타고 오는 옥수수의 껍질을 까서 포장 팩에 넣는 작업이었다. 1초에 1개를 까는 속도로 10시간, 그렇게 3일을 했다. 4일째 되는 날부터 양쪽 손목에 통증이 일었다. 다음날부터는 퉁퉁 붓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나는 끝없이 밀려오는 옥수수의 압박에 못 이겨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1주일간의 휴가를 신청하고,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했다. 책장을 넘길 때나, 젓가락질을 할 때, 휴대폰을 만질 때, 심지어 머리를 감거나 양치를 할 때도 쉴 새 없이 손목을 써야 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쉽게 해내지 못했다. 통증은 짜증으로 변해갔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관적인 한탄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강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과도한 작업량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상태로도 작가는 『바람이 분다, 가라』를 써내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왼손으로 껍질을, 오른손으로는 몸통을 잡고 잡아당기면 옥수수의 노란 속살이 드러난다. 상태가 좋지 않은 옥수수는 가차 없이 버린다. 2시간 30분이 지나야 15분의 휴식이 주어진다.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은 30분, 심지어 시급에 포함되지 않는 시간이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을 살아온 삶들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사명을 가진 사람처럼 옥수수를 깐다. 나는 노동의 순수한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나쁜 문장을 미련 없이 버리고, 손목에 통증이 올 때까지 쓰는, 과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문장의 숲에서 길을 헤매어본 적이 있었던가. 끝도 없이 밀려오는 옥수수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손목의 근육만으로도 부족하다. 다리를 힘껏 디디고, 허리를 곧게 세우며, 팔꿈치를 지렛대 삼아 움직여줘야지 손쉽게 껍질이 벗겨진다. 다시 말해, 온몸을 바쳐서 껍질을 까면, 먹을 수 있는 옥수수가 된다. 


  약속했던 1주일이 지났고 새벽에 눈을 떠선 다시 일터로 나섰다. 옥수수를 까기에는 무리라 여겨져 콩을 골라내는 일로 복귀했다. 붓기도 가라앉고 통증도 익숙해질 무렵이라 믿었건만,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는 어김없이 손목이 말썽을 피웠다. 나는 통증을 밀어내려 노래를 부르고, 첫사랑을 생각하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며 쉴 새 없이 뇌에 자극적인 생각들을 주입시켰다. 통증이 무감각해지더니, 결국 손목은 냉동실에 넣어둔 식빵처럼 굳어져 갔다. 나는 좀비처럼, 아니 신들에게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처럼 끝도 없이 밀려드는 콩 더미를 힘껏 밀어 올렸다. 


  스트랫포드(Stratford)하면 떠오르는 건 영국의 셰익스피어 마을이었는데, 호주의 시골마을인 이곳을 다녀간 이후로는 오로지 농장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옥수수, 콩, 피망, 호박 등의 야채들이 자라는 드넓은 벌판과 소가 걸어 다니는 길, 울창한 나무들, 비가 오면 범람하는 개울, 침실용 컨테이너 박스, 거울 없는 세면대,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화장실, 거미줄처럼 설치해둔 빨랫줄, 큰 소파 3개를 ㄷ모양으로 배치한 휴게실 막사, 그리고 맥락 없이 불어대던 바람.  

  이 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람 소리였다. 들판의 흔들리는 옥수숫대, 나무의 잎사귀, 새들의 지저귐 사이로 굽이돌던 바람은 막사의 지붕을 오르내리며 구멍 난 벽을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왔다. 바람은 머리카락과 콧구멍 사이를 숭숭 스치듯 달아났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회오리바람처럼 나는 사방에서 침입하는 바람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도 바람에 실려 가지 않았다. 간이 건조대에 걸어 둔 하얀 수건도, 접이식 의자도, 장화도, 70kg의 내 몸도, 여전히 막사 속에 있었다. 다만, 정처 없는 마음만이 문 틈으로 살며시 빠져나가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Stratford역에서 20분가량 떨어진 농장에서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서성였다. 그러다 어둠에게 노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여전히 별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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