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터 빅의 ‘Live in San Francisco’
타오르는 태양이 정수리를 쪼아대는 8월의 오후, 나는 골동품 상점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금융단지라는 거창한 이름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선 도심 옆에는 골동품이 즐비한 오래된 시장이 버티고 있다. 나는 금융기관을 방문해 신용평가를 받고 나오던 참이었고, 그날은 내가 정한 휴가였기에 이제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날이었지만 빌딩 내의 에어컨이 갑갑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사천백 원을 주고 산 아이스커피를 손에 쥐고 시장으로 들어섰다.
초등학교 때는 명탐정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스무 살의 봄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다. 신용카드 한 장 없는 나의 신용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대출 금리 역시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니. 무엇보다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금융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다른 꿈을 추구했다고 해서 금융상태가 더 나아졌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일정한 수입이 발생할 수 없는 작가라는 직업군은 냉혹한 세계였다. 그 현실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도전한 것이 후회스러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중고품 상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금융 빌딩에서 느낀 서늘한 기운과는 달랐다. 그곳에는 본 적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금이 간 항아리, 녹이 슨 불상, 눈이 없는 흉상, 바늘 없는 시계, 해어진 골프 장갑, 줄 없는 기타, 바늘 없는 턴테이블 앞에서 조금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한쪽 벽면에 LP가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이 물건들을 보자 씁쓸해졌다. 나의 신용을 다른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보유한 LP의 개수나 작사한 곡이나 써 내려간 시의 단어만큼으로. 어쨌거나 LP로 신용이 평가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수많은 중고 LP나 작가이면서도 작가를 꿈꾸는 나의 현실이 허름한 상가 안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로 만나게 되는 것이리라.
나는 경성대학교 앞의 ‘라디오’라는 LP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DJ의 전설, 도병찬 선생님이 운영한 그 가게는 지난 6월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스러지고야 말았다. 내가 그 가게에 단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어느 때고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이고, PD이고, 의사이고, 건축가인 손님들은 이곳에만 모이면 눈이 초롱초롱한 스쿨밴드가 되어 청춘을 흔들어댔다.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로, 희끗희끗 색이 바랜 머리로, 무거워 금방이라도 기댈 곳 찾는 그 주름진 머리로. 나는 그들 사이에서 숨죽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건 LP 한 장에 얽힌 추억이었지만, 그건 결국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ON AIR’가 꺼지지 않는 라디오의 스튜디오 안에서 음악 선배들의 청춘을 엿듣게 된 셈이었다. 최고의 일탈이자 행복이었던 그 세계가 사라지자 나는 이 여름을 어디서 보내야 좋을지 떠올리지 못했다. 도병찬 선생님은 내가 LP를 구할 수 있는 공간들을 소개해주었다. 나는 그 골동품 시장에 나를 기다리는 음악이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나는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프리랜서였으며, 그렇기에 철저히 시간을 운용해야 했지만, 음악 앞에서만은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찾은 곳은 LP 중고품 상점인 셈이었다. 나는 LP를 훑어보다 한 가지 전제를 만들어냈다.
골동품은 결국 시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다. 골동품 상점에서 가지고 나올 물건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타인의 시간이거나, 나의 시간이거나.
나는 미스터 빅을 주워 들었다. 나의 시간을 되돌려줄 물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상점 안을 두리번거리자 어디선가 주인아저씨가 나왔다. 삼천 원. 아저씨와 나눈 말은 그게 다였다. 나의 우상이었던 미스터 빅의 라이브 앨범에 값을 더 치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곳의 룰이 있는 것이다. 손에 든 사천백 원 짜리 커피가 무색해졌다. 나는 저 높은 빌딩 숲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목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턴테이블 위에 미스터 빅의 라이브 앨범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스피커의 볼륨을 올렸다. 나는 학창 시절에 미스터 빅의 라이브 앨범을 몇 백번이나 돌려 들었다. 미스터 빅의 음악이야 언제 들어도 강렬하고 경쾌하고 신이 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타를 담당했던 보이밴드 스크레치의 공연 리스트에는 미스터 빅이 늘 두 세곡이나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중요한 악기 하나를 잊고 살아왔다. 그건 바로 드릴이었다. 전기 드릴을 기타 줄에 가져다 대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그 연주를 잊고 있었다니. 그건 한 때 나의 꿈이 아니었던가. 드림이 아니라 드릴 말이다.
에릭 마틴이 샤우팅을 내질렀다. 유얼 대디, 유얼 브라더, 유얼 러버 앤 유얼 리틀 보이. 폴 길버트와 빌리 시언이 드릴로 기타 줄을 갈겨댔다. 팻 토피가 드럼 채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아이 윌 비 유얼 대디, 유얼 브라더, 유얼 러버 앤 유얼 리틀 보이. 나는 너의 아버지도, 형제도, 연인이나 소년도 될 수 있어요. 오 나의 드릴이여. 당신은 그 골동품 상점에 있었네요. 나는 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무더운 열기가 나의 폐부를 찔렀다. 검은 바이닐은 제자리를 돌고, 나도 여전히 제자리를 돌고,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미스터 빅도 돌고, 뜨거운 여름이 사람들을 돌게 만들고, 모든 게 돌고 있었다. 몇 번의 샤우팅을 외쳤던가. 이웃집 아저씨가 벽을 쿵쿵 쳐댈 것만 같았다. 나는 소리를 줄이며 숨을 죽이며 스피커 앞에 앉아 그들의 음악을 끝까지 들었다. 그것은 나의 오래전 시간이고, 짧은 휴가이자, 되돌아오지 않을 시간의 마지막 인사였다. 비로소 바늘이 들리고, 음악이 멈추자, 아주 잠깐 숨이 막혀왔다. 드림과 드릴 사이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진득진득한 땀을 닦아내고 판을 반대로 돌려 다시 바늘을 올렸다. 이내 미스터 빅의 강렬한 연주가 펼쳐졌다.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