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성은 Jan 13. 2019

안녕, 이방인

-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Riot On An Empty Street’

이방인


  “시간이 참 빨리도 가는 것 같아요.”


  호주 도클랜드에서 나와 함께 밴드를 결성한 종영은 베란다에 앉아 기타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명절을 기념하는 공연을 기획해왔지만 이미 계획한 날짜는 지나버렸다. 나는 맥주 두 병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게 말이다.”


  시간에 관해서라면 어떤 말도 더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종영의 옆에서 기타를 안아 들고 조율을 마쳤다. 우리의 선곡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커버곡 4개, 자작곡 4개, 연주곡 1개. 9곡이면 40여분은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사가 모두 한국어로 이뤄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종영과 나는 기타도 노래도 서툴렀지만 무엇보다 영어 발음에 있어서는 토종 한국인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호주 본토에서 주야장천 한국 노래만 부를 수는 없었다. 그들을 위해 부른다면 영어 노래도 준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비록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선택한 곡이 바로 <Kings Of Convenience>의 ‘Cayman Islands’였다.


  아파트 유리창은 녹아내릴 듯 붉게 물들어있었다. 도클랜드의 바다는 태양을 절반 정도 삼켜버렸다. 맥주도 이제 절반이 남았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술보다 가볍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깊이 있는 술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깊이를 꿈꾸게 한다는 것, 때론 그 자체가 더 큰 보상을 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어설픈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밴드를 결성한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였다.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날에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타국에서의 나의 모습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때야말로 말로 ‘이방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 안의 생경한 나를 바라보며 조소하거나 슬퍼했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타국에서 경험한 생생한 감정이었다.


무의미의 세계


  그날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나서야 우리는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었고 오해와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종영도 나도 마음속 텅 빈 공간을 어떻게 메울지 몰라 쩔쩔매는 청춘이기 때문이었다.


  방황하는 나에게 한 스승은 말했다.


  “돌아올 때를 알고 있다면 여행이고, 그때를 모른다면 방황이다. 비록 지금은 방황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시간이 여행으로 남길 기도한다.”


  나는 방황 속에서 아파했다. 지쳐 쓰러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건 어떤 무의미의 세계였다. 흐릿하고 몽롱하며 위태로운 내 안의 다른 나를 마주하며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허깨비 같은 실재를 그려보았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억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노래를 부르고 글을 쓸수록 괴로운 기운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르지 않을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직 그것만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흐릿하고 몽롱하며 위태로운


  검고 둥근 LP가 돌아가고 있다.

  ‘Places look the same, and we are the only difference. 풍경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달라진 것 같아.’ 읊조리는 노르웨이 청년들이 있다. <Simon & Garfunkel>을 떠올리게 하는 <Kings Of Convenience>는 기타 두 대의 화음으로 몽환적인 체험을 선사한다. 아르페지오는 흐르는 강처럼 잔잔하며 스트로크는 강을 건너는 사공의 노처럼 단단하다. 이들의 음악은 어느 때고 나를 도클랜드의 베란다로 멜버른의 길거리로 데려가 준다. 나는 이제 한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턴테이블의 바늘 끝을 바라보고 있다. 바늘은 LP의 소릿골을, 검은 그 표면을 긁어대고 있다. 긁히는 건 LP인데 찔리는 건 내 안의 어떤 기억이다. 나는 이곳에, 종영은 그곳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을이 지는 베란다에 앉아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가는 것 같아요.”


  종영에게도 내게도,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시간은 공평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하루가 이리도 빨리 지고 있다. 해가 어제처럼 또 저물고 있다. 차가운 맥주는 여전히 내 몸속을 흘러 다닌다. 가끔 이 앨범을 꺼내들 때면 종영과 기타를 치던 그 날의 붉은빛이 간절해진다. 흐릿하고 몽롱하며 위태로운,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그 빛이.




이전 07화 마술, 재즈 그리고 기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