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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8. 2023

사랑하는 마음은
무성하고 깊고 그윽하네 (1)

바람비가 오는 날, 나는 부추전에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나서 우비를 입고 산책을 나선다. 해안을 끼고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된 산책로에는 엄지손톱만 한 작은 게들이 길목 위로 나와 빠른 속도로 걸어 다닌다. 내가 멈추고 주시하면 게도 멈추고 나를 주시한다. 내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게는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내가 재빨리 멈추면 그도 멈춘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거울 놀이를 한다. 산책길 왼편에는 로즈메리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짙은 향내와 갯바람이 콧속을 훑고 간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우두커니 불 밝힌 김녕미항 식당 근처로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아스팔트 경사로가 보인다. 해초와 이끼로 뒤덮인 경사로는 빗물로 더욱 미끄러워져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솟구치는 파도가 흰 물갈기를 일으키며 내 몸을 휩쓸어 심연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다. 검은 현무암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술 취한 내가 황천길 갈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해안 도로변을 걷다 보면 양식장 주변 물속을 겅중겅중 걷던 회색 왜가리가 갑작스러운 사람의 등장에 후드득 날아오른다. 길섶에 핀 보랏빛 무꽃들은 작고 여린 얼굴들을 맞대고 군락을 지어서 모진 바람을 견디고 있다. 전복, 오분작, 멍게를 파는 천막을 둘러친 작은 식당은 조도가 낮은 전등을 켠 채 주인이 홀로 빈 그릇을 닦으며 손님을 기다린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날의 해안보다 모진 광풍이 부는 해안은 시시때때로 위태로워 사람의 영혼을 잡아끄는 데가 있다. 도로변에 자란 강아지풀과 새풀들은 사나운 바람에 휘청이면서도 서로에 의지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돌담을 둘러친 들판에는 청보리들이 일제히 땅에 몸을 뉘고 포복해 있다.  

    

이제야 나는 알 것만 같다. 내가 왜 이 외딴 바닷가 마을로 왔는지. 나는 자연의 소란스러움과 격렬하게 약동하는 생명의 움직임 속에서 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출퇴근을 위해 왕복 3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던 그 시절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울의 사람들과 인천, 경기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이 그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엄연한 사실 속에서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지하 터널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이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무엇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노동에 할애하도록 만들었는가. 아침 7시 무렵의 지하철에는 빼곡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운 좋게 앉을 자리를 마련한 사람은 부족한 잠을 잘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손잡이를 잡고 몸을 간신히 지탱한 채 졸고 있는 다른 이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거나,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박은 채 지하에서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터널을 통과한다. 그 아침 시간의 지하철은 언제나 그렇게 조용하기만 하다. 모두들 자신이 수행해야 할 하루치 노동의 양을 가늠하느라 그 아침의 지하철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쉽게 떠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깊은 피로와 갈증을 본다. 최근 2년여의 시간에 걸쳐 출퇴근 시간에 장애인단체의 지하철 이동권 투쟁이 지속되면서 직장인들의 통근길은 더욱 힘겨워졌고, 국가와 투쟁하던 장애인단체의 시위는 목숨을 건 긴 싸움이 되었다. 지하철은 한마디로 생존 투쟁의 장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지하철의 손잡이에 매달린 채로 그 싸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던 중에 무심코 내 몸에 병이 든 것을 발견했다. 더는 이 현장에 내 몸을 실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아침의 지하철에서 모두들 그렇게 굳게 입을 다물었던 것은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우리는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점차 가난해져 간다. 영혼이 빈곤해질수록 몸은 병들어 간다. 자신의 존재가 거의 흐릿해져 갈 때쯤 몸의 질병은 그렇게 터져 나와 영혼이 쏘아 올린 폭죽과 같은 신호탄이 된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존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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