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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6. 2023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슬픔 (2)

“증언은 비언어적 감각의 차원을 포함하는 울림의 영역에 자리한다. 이렇게 보면 증언집은 증언이라는 음악을 기록하고 상상하게 하는 악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을 듣고, 기억하는 것이자, 말하는 이를 느끼며, 그 울림에 공명하는 것이다.”*    


목소리도, 언어도, 역사도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목소리들이 더 많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하고 사라져 간 무수한 목소리들 앞에서 우리는 다만 살아가기 위해 침묵하며 오늘의 생존에 허덕이게 된다. 영화 <아이캔스피크>에서 동네 슈퍼를 운영하는 진주댁은 봉원 시장에서 오래 알고 지내던 나옥분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우연히 알게 되고 나서 한동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녀는 왜 옥분 할머니를 피했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이 바로 내 곁에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 심연 속에 들어가 그 사람과 함께 허우적댈까 봐, 그를 구해내지 못할까 봐, 자신의 무능과 맞닥뜨리게 될까 봐 직시하지 못한다. 그런 진주댁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나는 고백한다. 


한 개인이 겪은 고통이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인다고 해서 그 고통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도, 이해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고통만이 실재하는 진실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닳고 닳은 역사적 문제라고 냉소하고 비아냥거리는 현재에도 일본은 사과와 망언 사이를 오가며 과거 청산을 위한 일관되고 지속적인 사죄는 여전히 이행하지 않고 있고, 이에 대해 생존자들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아, 그게 진실하다는 걸 알기에―”라고 말한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같이 고통의 표정이 말해주는 무언의 진실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작업을 조금씩 지속해 나가는 일. 언어로서 징검다리를 놓아 가며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는 일.     


새시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니, 귀신처럼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던 바람은 내 몸을 순식간에 통과해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가 그릇들을 덜거덕거리게 한다. 그제야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물들에 가닿지 않으면, 제 존재를 드러낼 수 없어 서러워 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바람에 어둠 속에 출렁이던 파도는 하얗게 부풀어 더욱 위태롭게 춤을 춘다. 격랑의 화가라 불리던 변시지 화백의 그림처럼 태풍과 절벽, 사람 하나, 조랑말 하나, 낮은 돌담, 초가집, 누운 소나무들이 보이는 것만 같다. 바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그 어디에서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바람은 갈기갈기 찢어져 기어이 사라지고야 말 자신의 숙명으로 우리의 영혼을 산산이 흩어 놓고 광기와 두려움에 빠지게 하지만, 그 속에서 휘청이며 서 있는 인간의 현존을 응시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련한 운명을 응시할 뿐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리가 절대적 근원으로 회귀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자신의 몸이 하나의 악기처럼, 새처럼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우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렇게 우리는 개인의 상처에서 인간의 고통에 공명하는 존재로 변해 간다. 침묵의 심연에서 살아 있는 목소리를 길어 올리는 존재가 되어 간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개정판), 풀빛, 2021,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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