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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5. 2023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슬픔 (1)

김녕에 온 지 한 달이 되어 가는 동안, 나는 이곳이 제주에서도 가장 한갓지고 고요한 곳인 줄로만 알았던 나의 무지에 한탄했다. 이곳은 가장 조용한 곳은 맞지만,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김녕은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북제주 해안가 마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으나 대기의 흐름만으로 돌멩이며, 풀이며, 청둥오리며, 떠돌이 개며, 벚꽃이며, 모자며, 전봇대며, 쓰레기통이며 할 것 없이 모두 날려버릴 기세로 바람은 사납게 부는 것이다. 바람의 기세에 도대불 언덕배기의 참억새는 허리가 꺾여 땅에 바짝 붙어 누워 있다. 따개비들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온 힘을 다해 바위 위에 붙어 있고, 해초들은 검은 바위에 지친 육신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이곳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바람이 ‘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밤이 깊을수록 그 소리는 더욱 거세어져서 통곡이 된다. 이 곡소리가 지친 목소리로 내 숙소의 창문을 밤새도록 두드린다. 그러고도 창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바람은 문과 벽의 틈새로 들어와 숙소 건물 전체를 타고 흐른다. 벽을 타고 흐르면서 복도에서 계단에서 곡소리를 내고 자동 센서가 달린 등을 깜박이고 간다. 

바람은 울다가 지치면 신음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창밖에서 서서 애원하는 캐서린의 유령과 같다. 황야에서 20년 동안 떠돌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빛이 켜진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망자의 비통한 목소리 같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소리로 사물에 가닿고 파열하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방파제 쪽을 걸을 때면 그 바람은 살 속을 파고들어 내장을 찌르고 머릿속을 휘저어놓고 나간다. 그러면 나는 사람이 싫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에 온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사람의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이 대자연의 흐름에 그저 깃발같이 나부끼기만 하다가 숙소 마당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백구 두 마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암컷인 두 자매는 바짝 붙어 앉아서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바람을 견디고 있다.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 마당 밖을 서성이는 떠돌이 개들을 향해 맹렬하게 짖어댄다. 그러면 그 소리는 모진 바람을 타고 저 먼 산속의 깊은 어둠에까지 가닿는다. 산짐승들도 바람을 피해 몸을 웅크린 채 제 새끼들을 껴안고 침묵하고 있다. 부엉이들은 눈을 껌벅이면서 밤의 정령처럼 어둠을 응시하고 있다. 바람은 잠들지 말고 깨어나서 신음하는 목소리들을 들으라 한다.    

  

그 외로운 산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슬픔,
인간의 마음을 깨우는 대지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중심에 둔다. 

- 에밀리 브론테, 「스탠자스」*

     

바람은 내 몸속에 들어와서 뼈를 휘감고 공명하는 소리가 된다. 우리가 외부 세계의 소리를 몸속으로 받아들여 그 소리와 내 몸이 함께 울리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책으로 편찬**한 여성국제법정 증언팀은 증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 구술된 언어를 문자화하여 편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 또한 이 전쟁 범죄의 ‘증인’이 되는 존재의 전이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수년의 시간에 걸쳐 완성해 낸 이 증언집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기 위해 우리가 어떤 태도와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거대한 교과서와 같다. 증언팀은 면접자로서 생존자의 기억을 ‘말’로써 이끌어내고 그 말을 ‘들음’으로써 기억의 복구와 고통의 재현을 돕는다. 증언팀이 모인 시점인 1999년을 기준으로 60년 동안 응결된 침묵과 방관의 시간을 뚫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 나오는 과정 자체가 지난한 과정이었음을 그들은 고백한다. 



*   에밀리 브론테의 시 「스탠자스stanzas」의 마지막 연을 필자가 번역하여 인용하였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지음,『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5,  한울, 풀빛, 1997~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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