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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소연 Jul 29. 2023

사랑하는 마음은
무성하고 깊고 그윽하네 (2)

돌 위에 앉아 있는 벙어리 새,
벽에서 떨어지는 축축한 이끼, 
수척해진 가시나무, 우거진 산책로,
나는 그것들을 사랑합니다,

- 에밀리 브론테, 「잠시 동안」(1838)     


흰옷을 즐겨 입던 이 맑고 정한 시인이 말 못 하고 수척해진 것들을 사랑하듯, 나는 아픔을 품은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통증을 간직한 존재들은 등을 웅크리고 견디는 법을 안다. 그렇게 자신만의 조용한 처소에서 작은 짐승처럼 제 무릎을 끌어안는 존재들. 밤의 어둠을 견디고 단정하고 순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존재들. 마치 지상에 내리는 첫눈처럼. 스스로 환해지다가 사라지는 것들. 지하철 출근길 의자 한 편에서 웅크리고 잠든 이들, 선 채로 간신히 졸음을 쫓는 이들,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지하의 삶을 견디는 도시의 노동자들, 끝 모를 투쟁을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 시위대들… 이들 모두의 기울어진 어깨 위로 첫눈이 떨어질 때 그 환해지는 순간을 믿게 되는 것.

눈이 많이 내린 아침, 망원역에서 내려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 출판사로 출근하는 길이면 그 하얀 눈길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뽀득뽀득 차가운 눈을 밟을 때면 나는 잠시 내가 노동자임을 잊게 되었다. 골목 모퉁이에 있는 수녀의 집을 돌아갈 때면 마음은 눈처럼 깊고 고요하고 환해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물걸레질을 하고 계시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나를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맞아 주시는 아주머니. 하루 중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나, 계단에서나, 사무실에서나, 탕비실에서 마주칠 때면 싱거운 대화를 했고, 고단한 하루의 시작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나는 자꾸 웃게 되었다.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 겨울을 통과하여 나는 광풍이 부는 초봄의 제주 바닷가 마을로 오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노동자 신분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노동하러 가기 위해 걷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산책하기 위해 바닷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자주 취했고, 바람을 수도 없이 맞았다. 곧바로 감기를 앓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흐르면서 몰아치는 파도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마에 들끓는 열기처럼 나는 내 노동의 시간들을 아로새기기 시작했다. 노동으로부터 도피해 온 시간 속에서 말이다. 

    

그리하여, 새처럼, 
혹은 배처럼,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빛을 
미의 세계로 도피시켰다네*


해안 도로변에서 서 있던 나는 문득 너무 많이 걸어왔음을 깨닫는다.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었다. 대신 자연 속으로, 미의 세계로 도피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따라 걸어 돌아간다. 입고 있던 노란 우비는 비바람에 휘날리고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 저 멀리서 떠돌이 개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젖은 솜털뭉치 같은 그것은 꼬리도 늘어뜨리고 귀도 늘어뜨린 채 늙은 개처럼 쓸쓸한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러다 종종걸음을 치며 산책로 밖을 훌쩍 벗어나 양식장 뒤편으로 몸을 숨긴다.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긴 나처럼.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두운 느낌이 들어서 무서웠다. 집안사람의 편지에서는 번번이 흑산을 자산이라 표현했다. ‘자玆’ 역시 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도피를 택한 나는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써 내려간 이백여 년 전의 위 글에서 고독을 새로이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고독을 선택한다는 것은 “음험하고 죽은 검은색黑이 아니라, 그윽하고 살아 있는 검은색玆”***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검을 자玆에 마음 심心을 더하면 사랑과 자비의 자慈가 된다. 사랑하는 마음은 무성하고, 그윽하고, 깊은 검은색의 마음들이 모여 생겨난다.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풀처럼 자라난다. 

해마다 3~5월이면 몸속에 알을 품은 서해안의 주꾸미들이 낮이면 바위틈이나 바위 구멍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면 산란을 위해 활동한다. 『자산어보』에서 ‘웅크린 물고기蹲魚’라 일컬었던 그 연체 생물은 고독을 퍽이나 사랑하는 어류에 속하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와 비슷한 색인 회색으로 자기 몸의 색깔을 위장한다.

나는 제주란 섬의 검은 바위들에 몸을 웅크리고 될수록 낮게 포복하여 작고 여린 것들에 몸을 기대어 아팠던 마음의 상흔들을 그려본다. 고망난 돌이라 불리는 이 바위들의 무수한 구멍은 우리 마음의 상흔들과 같다. 화산의 폭발하는 열기들이 그들의 몸을 뚫고 나오듯, 파열의 기억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는 것. 이 상처의 무늬들이 바위 위나 바위틈에 붙은 따개비 군락이나 거북손, 담치, 군부, 바위살랭이처럼 살아 있는 것들의 은신처가 된다. 나는 이 깊고 그윽한 색을 품은 고독의 생명체들을 오래도록 사랑하겠다고 생각한다.     



*  에밀리 디킨슨 지음, 윤명옥 옮김,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디킨슨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  정약전․이청 지음, 『자산어보』, 서해문집, 2016, 30쪽

*** 영화 <자산어보> 속 정약전의 대사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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